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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해리 능력(?)

플라밍고 2016. 2. 7. 23:14

 

 

에드워드 호퍼의 '해질녘의 철로' (1929)

 

 

 

해리성 장애의 원인 중 하나로 '해리성 능력'을 꼽는 이론가들이 있다.

해리성 능력? 현실을 벗어나는 능력?

처음 이상심리학을 배울 땐,

그게 있다면 나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 같다.

 

#1.

2005년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다.

외상은 없었으나 기억에 약간 문제가 생겼었다.

지금도 당일의 기억은 없다.

단순히 사고 당시 머리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고,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새로운 가설을 세워봤다.

 

사고 후 처음 눈을 떴을 때,

나는 엄마한테 "내 핸드폰 어딨어?"라고 반복적으로 물었다고 한다.

확실히 머리에 충격이 있긴 있었던거다.

반복적으로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끝내고,

핸드폰 충전이 다되었을 때쯤,

나는 친하게 지내던 학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헤어졌던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고 소식을 알렸다.

 

사고 당일의 난 약 2년 전의 기억으로 돌아가 있었다.

당시 난 졸업했었지만 스스로 대학생인 줄 알았고,

당시 약 6개월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가 현재 남자친구인 줄 알았던 것이다. 

 

단기기억상실증이라는 신기한 경험이 재미있어서,

지금도 친한 사람들에게 재미난 얘기거리로 삼곤 하지만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왜 하필 약 2년 전으로 돌아간 것인가?'이다.

 

사고 났던 당시에 나는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던 시절이다.

난 새로 시작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고,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

'괜히 어깨에 힘 잔뜩 넣고 언로사 들어가겠다고 쓸데없이 허송세월하지 않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기업에 원서를 넣었으면 삶이 좀 나아졌을까?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고,

결국 내가 보낸 시간들을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드는 것 같아서 부정하곤 했다.

 

아마 그래서,

사고 후 내 기억을 2년 전으로 대학 3년 정도로 돌린 것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하기에 다른 것을 해볼 수 있는 시간으로.

 

#2.

어린 시절 기억이 별로 없다.

3-4살은 물론이거니와 초등학교 입학 전 기억이 별로 없다.

머리가 별로 안 좋아서 일수도 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일수록 어린 시절 기억을 생생하게 한다던데..

 

그래서 아빠는 억울하다고 한다.

어려서 품에서 떼놓은 적이 없을 정도로 잘해줬다는데,

내가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하기 때문이다.

정말 기억이 잘 안난다.

 

그러다 또 문득,

나의 유년 시절 기억 중 많은 부분이 부모님의 갈등 상황임을 알아차렸다.

사실 부모님의 불화도 그나마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자주 싸웠지' 정도지,

구체적인 기억은 없다.  

원래 인간은 부정적인 기억을 잘 한다고 하지만

내겐 구체적인 감각, 느낌은 없고 신문기사처럼 "~했다."라는 명제만 있을 뿐이다.

 

우리집이 다른 집에 비해서 더 화목했다거나 더 불행했던 것은 아니고,

상당히 평범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어린 나에게 부모님의 불화는 감당하기 어려운 경험이었을 수 있다.

기억은 없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철학(?)은,

"평화는 없다. 평화처럼 보이는 시기는 단지 다음 전쟁을 위한 잠깐의 휴지기일 뿐이다."이다.

당시 나는 안전, 평화, 화목을 믿지 않았고, 늘 불안의 연속이었다.

분명한 건 이것은 실제 사실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나의 주관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당시의 부모님의 불화는 어느 가정에나 있을 수 있는 어린 부부의 시행착오임을 이해하지만

어쨌건,

당시 어린 나는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나에게 그때부터 해리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그나마 감당할 수 있었던 초등 고학년쯤 돼서야 기억이 난다.  

 

그 밖에도 내게 끔찍했던 시간들을 박제한 채 기억 저편으로 밀어넣은 사건들은 더 있다.

해리 능력이 아니라 누구나 경험하는 기억의 한계일 수 있다.

 

난 때때로 내 기억이, 내 삶이, 내 감각이 낯설 때가 있고,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늘 궁금했다.

동기화된 망각이든 해리성 기억상실이든 뭐라도 설명할 수 있었으면 했다.

설명할 수 있으면 됐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