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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비길렘 일인무
발레단 입단 3년 만에, 그리고 프랑스 오페라 발레단 350년 역사상 최연소로 발레단 최고 위치인 에뚜왈(Etoile)이 된 천재 발레리나 실비길렘
실비 길렘에 대한 사전지식이라고는 고작 LG아트센터의 안내책자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실비 길렘 이후로 발레계에 스타가 나오질 않는다길래, 얼마나 대단한 무용수일까 궁금했다. 워낙 발레리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가 커서 42살이 되어버린 천재 발레리나는 어떨지 상상했었다. 그녀가 춤을 춘다는 것 자체가 특별하다는 극찬을 받는 공연을 다녀왔다.
대단하다. 믿을 수 없이 긴 그녀의 팔과 다리는 너무나 유연하고 우아하여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고 있는듯 했다. 대개 무용공연을 보면 그들의 신체적 자유로움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실비 길렘은 특히나 편안하고 쉬워보였다. 왼발 끝으로 선채 오른쪽 다리를 귀 옆에 붙이듯 일자로 서는 '6시 포즈'로 유명하다더니, 그 균형감과 안정감이 놀라웠다.
실비 길렘은 손목에 쇠사슬을 묶고 등장한다. 쇠사슬이 그녀의 움직임을 자유롭지 못하게 구속한다. 그녀는 전통을 뛰어넘고 싶지만, 고전발레는 그녀에게 강요할 뿐이다. 그녀는 쇠사슬을 던져버리고 일인무를 시작한다. 쇠사슬을 벗어난 그녀의 길고 우아한 팔은 눈물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답을 찾기로 한 그녀의 고민이 소탈하게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줄넘기 하다가 갑자기 허무해진 샐리의 이야기를 곁들인 그녀의 고백은 관객과 소통하는데 효과적이었다. 발레로 단련된 그녀의 움직임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2. 아크람 칸 일인무
인도 전통무용인 카탁을 배운 아크람 칸은 현대무용 안무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 한다. 피나 바우쉬, DV8의 로이드 뉴슨을 공부하면서 현대무용의 비완전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인도의 신 '크리슈나'를 완벽하게 연기하고 싶었던 캄은 나날이 머리 숱이 적어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원하는 크리슈나의 외형을 완벽하게 흉내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크리슈나를 연기할 것인가, 자신 안의 크리슈나를 끄집어 낼 것인가를 고민하던 칸은 아름다움 대머리 크리슈나가 되기로 했다.
아크람 칸의 일인무는 실비 길렘과는 확연히 달랐다. 빠르고 강렬했다. 실비 길렘이 가늘고 긴 육체로 공간을 품어 안고 흐름을 만들었다면, 아크람 칸은 작고 단단한 육체로 공간을 빠르고 힘있게 진동시켰다. 카탁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카탁을 현대무용에 접목한 것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지만, 실비 길렘과 확연히 다른 아크람의 움직임 역시 좋았다. 사람들이 바라는 완벽한 크리슈나를 연기할 수 없었던 고뇌를 유머러스하고 귀엽게 고백해서 더욱 좋았다.
#3. 실비 길렘과 아크람 칸의 이인무
처음에 둘은 티격태격 싸운다. 발레와 카탁. 애초에 확연히 다른 기술을 연마한 그들은 전통을 뛰어넘고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사사건건 부딪치고, 튕겨낸다. 유연하고 아름다운 실비 길렘의 동작은 아크람 칸의 빠르고 강렬한 움직임과 섞이지 못한다.
이 부분이 가장 재미있었다. 실비 길렘과 아크람 칸의 움직임은 자석의 N극과 N극처럼 서로를 밀어내기만 한다. 마음과 다르게 하나가 되어지지 않는 그들은 표현하는 안무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끝내 그들은 대화를 시도한다. 현대무용에서 무용수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대화는 더 나은 고지를 위해 전통을 깨고 새로움에 도전하고자 하는, 같은 고민을 하는 최고의 무용수들의 대화이지 않는가. 게다가 센스있게 유머까지 겸비했다.
티격태격 하던 두 무용수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Is this right?"와 "Is this wrong?"을 계속 고민하다가 그들은 결국 하나의 움직임을 완성한다.
다른 배경과 신체적 조건을 가졌고, 너무나 다른 동작을 습득해온 두 무용수가 만나, 각자의 깨달음을 하나로 융합하다. 서로를 무작정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훌륭한 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조화를 만들어낸다. <신성한 괴물들>은 뚜렷한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무용수들의 대화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춤도 전혀 난해하지 않고, 그들의 몸언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하게, 안정되게 춤을 추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아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생각하는 것이라 느껴졌다. 그들은 생각을 바로 몸으로 나타낼 수 있을 만큼 최고의 무용수였다. 내 머리 속을 글로 표현하는 것조차 힘들기 그지없는 나로서는 그 부분이 최고로 감탄스러웠다.
#4. 그외
<신성한 괴물들>은 분명 실비 길렘과 아크람 칸의 무대였지만, 두 보컬도 상당히 인상깊다. 보컬이 무대의 일부가 되는 것은 그리 색다를 것이 없으나 무용수들과 함께 연기를 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들의 목소리와 음악은 실비 길렘과 아크람 칸의 움직임과 완벽하게 어울린다. 사람의 목소리 역시 악기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오랜만에 춤을 봐서 그런지 공연 전부터 무척 설렜다. 올해 LG아트센터 공연패키지를 구매하지 못해서 살짝 아쉬웠는데다가, 최근에 본 공연이나 전시회가 만족스러운 것들이 없어서 무척 갈증났었다. <신성한 괴물들> 덕에 갈증이 해소됐으나, 올해 공연 보는 지출을 줄이기로 다짐한 것이 흔들린다. 작년 보리스 에이프만의 <차이코프스키>에 이어 만족스러웠던 공연이었다. LG아트센터에서 본 올해 첫 공연인데 대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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