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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기분 더러운 날

플라밍고 2016. 11. 29. 00:35

Lucian Freud

 

#1.

기분 더럽다.

이것저것 다 신경질 난다.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짜증이 난다.

운동을 하고 땀을 흘렸는데도 화가 멈추지 않는다.

 

아 ,진짜 이럴 때는 하등의 쓸모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대고 웃고 나면 나을텐데.

그놈의 하등의 쓸모 없는 이야기가 이렇게 귀할 줄 몰랐다.

진짜 이런 날은 입도 벙긋하기 싫다.

 

자신의 불안을 사방에 드러내는 A를 상대하는 것도 싫고,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듯한 B의 좁은 식견도 지겹고,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요청하는 C도 귀찮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떠먹여 달라고 징징대는 D는 역겹다.

 

대부분 그들에게서 나를 보기 때문인데,

심지어 나는 내 불안을, 좁은 식견을, 내 욕구를 드러내지도 못하고 요구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사실상 내가 더 병신이다.

 

"병신도 병신이라면 좋다는 사람 없다."

  - 누구라도 자기의 결점을 맞대어 놓고 지적하면 좋아하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갑자기 휴먼스테인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2.

이 더러운 기분을 벗어 던지려면 어째야 하나...

 

(1) 여행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긴 시간도 필요없다.

길어봐야 1주일이면 될 것 같은데.

 

이 와중에도 IRB 심사는 넣어놓고 떠나야겠다고 생각을 하니...

왜 이렇게 생겨먹었나.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나.

뭘 이렇게까지 열심히 사나.

 

IRB만 끝나봐라.

다른 사람들한테는 힘들면 스트레스 받지 말고 다 때려치우라고 하면서,

심지어 그들이 진심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번 겨울엔 혼자 떠난다!!

라고 외치지만 못갈 가능성이 크고.

내년 상반기에 논문 쓰고 겨울엔 오로라를 보러 가고 싶다.

(이건 꼭...)

 

(2) 연애

그냥 순전히, 내적 혼란 없이, 내 애정을 마음껏 퍼부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한데,

강아지, 고양이와 같은 작고 귀여운 털있는 동물이랑 같이 있음 좋을 것 같다.

그럼... 난 더 사람을 싫어하겠지...

동물을 키울 수 있는 집을 구해야겠다고 잠깐 생각했으나

금세 정신 들었다.

 

학부생들 대상으로 연애특강 하면서

나도 못하는 걸 강요하고 나온 것 같아 찜찜하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의 마음이야 남의 마음이고,

내가 한껏 빠져들었을 때의 즐거움을 잊고 있었다.

 

(3) 쇼핑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때마침 논문을 쓴다는 핑계로 모니터 큰 노트북이 필요했는데,

아름다운 노트북을 찾아봐야겠다.

물론 지금의 맥북에어도 여전히 아름답고 기능상 전혀 문제는 없지만

오래되었고 모니터가 작으니 보다 큰 노트북을 사야겠다.

맥북에어를 처음 선물 받았을 때,

매일 아침 맥북에어를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던 게 생각난다.

내일부터는 예쁜 노트북 찾기에 집중해 봐야겠다.

 

(4) 공부

논문이 됐든 상담이 됐든 개인적 관계와 관련 없는,

혼자만의 flow 상태로 빠져들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어딜 가지 않아도, 대상 없이도, 소비 없이도 가능한데,

시작이 어렵네...

어차피 아무리 발버둥을쳐도 다음 달부터는 피할 수 없으니,

이걸 기뻐해야 하나...

 

(5) 취미

늘 궁금했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

허구의 캐릭터를 만들지만 결국 그만의 생명력을 가지고 오히려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틈틈이 한 글자씩을 쓰는 것.

무언가를 창출하는 새로운 취미생활이 필요하다.

돈을 버는 게 아니니 부담없이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논문도 그렇게 되면 참 좋을텐데...

 

생각해보니 많네.

다 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