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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이 손에 안 잡히는 날

플라밍고 2016. 7. 19. 16:34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일이 많으면 오히려 다른 생각이 잘 나지 않는데 그만큼은 아닌가보다.

분명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꾸역꾸역 지내고 있는데, 이 와중에도 투정부릴 시간이 있는 거 보면 아직은 살만한가 보다.

 

한때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참 좋아했었고,

양조위와 장만옥을 참 좋아했었다.

화양연화는 외로움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이고,

아직까지 양조위, 장만옥만큼 외로움을 잘 표현하는 배우는 없다.

왕가위 영화가 좋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렇게 외로운 사람들에게 그 어떤 희망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하든 그들은 앞으로도 쭉 외로울 것이다.

난 오히려 그 결론이 위로가 된다.

 

언제부턴가 외로움은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감정이 되었고,

더 이후로는 분노 이외에는 그 어떤 감정도 내겐 그닥 자극이 되지 않았다.

'무감 김선생'이라는 별명이 왜 생겼을라고.

 

그런데 내게 변화가 생겼다.

계기가 너무나 뚜렷해서 차마 입밖으로 내놓기도 창피한데,

내가 약 3개월째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니 밖으로 꺼내놓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봐야 블로그에 끄적이는거지만.

 

난 여전히 그가 그립다.

이미 대차게 차이고 끝난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여전히 말도 안되는 미련을 갖고 있다.

 

 

워낙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를 활용하는 데 대가이기 때문에, 평소 감정이 롤러코스터 타듯 오락가락 하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늘 실망할까봐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편인데, 그 변화 이후로 쓸데없는 억압, 통제는 의식적으로 안하려고 하는 편이다.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내가 창피하긴 한데, 아무도 모르니까 괜찮다며 스스로를 달래긴 하는데... 만약 나같은 내담자가 상담을 왔다면, "괜찮다, 하고 싶은만큼 해봐라."라고 했겠지. 창피해도 죽지 않는다고. 그 경험에 충분히 접촉하고 의미를 찾아보자고 했겠지. 그래서 나는 서둘러 충분한 의미를 찾았다.나의 또다른 주 방어기제는 합리화, 주지화니까. 

 

나는 본디 내가 견디기 어려워하는 경험을 벗어나려고 죽자고 일하는 편이었는데. 일중독자라는 별명이 왜 생겼을라고. 이젠 더이상 죽자고 일을 해도 그 경험에서 벗어나지지 않으니, 내가 예전보다는 인간적이 되었다고나 할까.

예전보다 유연해지고, 보다 겸손해지고, 보다 부드러워졌을 순 있다. 대신 예전의 매력 중 잃은 것이 있겠지.  

 

 

 

또다시 회피하려고 하는데,

어쨌건 중요한 건,

내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여전히 그가 그립다는 것이다.

 

굳이 따져보자면,

이 감정이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가 과거부터 억눌러왔던 빗장이 풀어진 것일 수도 있는데,

더이상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쓸데없이 피곤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때때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그가 그립다.

그리고 끝, D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