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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기숙사 2일차

플라밍고 2014. 3. 5. 23:50

 

<노상>, 박수근, 1960

 

 

며칠 전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재미있게 다녀와서인지, 박수근의 그림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전시 후 박완서의 '나목'을 읽고 있는데, 옥화도씨가 박수근을 떠올리게 한다.

저리 단순하지만 힘 있는 선은 교박한 땅을 다시 일구고자 하는 서민들의 잔잔하지만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위의 그림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 특유의 돌맹이 같은 느낌(마티에르 기법)의 바탕 위에 흐릿하지만 단단하고 단순한 형태가 근사하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숴지고 척박해진 땅이 그리고 사람이 얼마나 엉망이었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는데, 박수근의 그림에서는 배경 없이 심지어 인물마저도 디테일한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한 채 형태만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당시의 믿기 어려운 상황에 굴복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있는 그대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꾸준히 살아내는 서민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느껴졌다.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잎도 꽃도 없는 회백색 나목이 대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나목에서 따뜻한 기운과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성품이고 메시지때문일 것이다.

 

기숙사에서 첫 날, 갑자기 '내가 이 나이에 뭘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 순간적으로 얼음 송곳에 찔린 것처럼 차갑고 따끔한 비참함이 몰려왔었다. 워낙 한가지 목표에 집중하면 다른 대안을 생각할 줄 모르는 융통성 없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별다른 대안이 없기도 하기 때문에 목표에 집중하는 것일 수 있다. 어찌됐거나 나의 심란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나의 여러가지 전혀 우아하지 못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비루한 일상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처럼 나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것만이 최선이겠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공부한 것으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술로 먹고 살겠다는 신념을 지켜낼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서른 다섯의 생일에도 결론은 역시, 누가 뭐래도 우아하게 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