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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영화

<영화> 밀양

플라밍고 2007. 5. 28.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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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시작해서 땅에서 끝나다.

이창동 감독은 하늘이 아니라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삶을 말한다.

영화 '밀양'은 꽤 긴 런닝타임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재미있다고 하기에는 주제가 좀 무겁다. 분명한건 영화관을 나와서도 오랫동안 가슴이 먹먹한 영화였다. 아마 꽤 한동안 '밀양'을 곱씹을 것이다.


#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누가 용서할 수 있느냐

전도연의 훌륭한 연기 덕분에 '신애'의 격동적인 감정의 변화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신애는 남편을 잃고 밀양에 살러온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완전히 낯선 곳에서 새롭게 시작한다. 자신의 절망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싶은 것이다. 도시여자로서 세련된 척, 돈 많은 척 등 온갖 센 척을 하는 것은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함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남편도 잃고 아들도 잃은 여자가 혼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 더이상 무엇이 있을까. 종교는 어떻게서라도 그녀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는 지푸라기였다. 신애는 그녀의 분노와 고통을 더이상 스스로 감당할 수가 없기에 하늘에게 맡겨버린다. 행복하다고,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억지로라도 자신을 달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을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처절한 절박함에서 그녀를 구원해 준 하늘은, 유괴범도 구원했다. 신애가 용서하기도 전에 유괴범은 구원받았다. 아무리 행복하다고 되뇌여도 늘 고통스러웠던 신애는 평화를 얻은 가해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이미 하나님에게서 용서받은 가해자에게 신애의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피해자의 용서가 없는 가해자의 참회는 모순이다.

영화 '밀양'은 이 시점에서 의미가 있다. 인간은 땅을 딛고 살아간다. '밀양'은 관계와 고통, 즉 삶은 땅에서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하늘을 통해서가 아니라 땅에서 참회하고 용서하고 화해가 이루어져야하지 않을까. 우리가 다같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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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자신의 삶의 이유를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찾던 신애는 결국 보이지 않는 하늘을 상대로 분풀이를 한다. 억누를 수 없는 분노는 대상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애가 찾던 위로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었다. 보이는 것도 전부는 믿지 않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 하늘을 좇는 동안, 그녀의 한발자국 뒤에 종찬이 있었다.

늘 그 자리에 단단히 서있는 종찬은 신애가 그리 찾아 헤맨 하늘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찾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던 삶의 희망은 곁에 있는 종찬이다. 다방아가씨의 치마 속이 궁금하고 직함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속물이지만 바보스러울 정도로 그녀의 곁에서 든든하게 신애를 지키고 사랑한다. 게다가 종찬은 손내밀면 닿을 수 있을 거리의 땅 위에서 단단히 서있다. 그래서 신애의 고통 속에도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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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머

진지하고 무거운 영화임에도 송강호의 연기는 유머를 자아낸다. 영화의 무거운 주제와 조화를 이루는 그의 유머러스함이 감탄스러울 뿐이다. 그의 대사는 전부 애드리브 같을 정도이다. 지렁이를 보고 깜짝놀란 신애에게 던지는 대사는 압권이다. 또 카센타에서 노래방 기기로 혼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종찬이라는 경남권의 소시민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적절했다. 종찬의 캐릭터는 존재감을 잃지 않으면서 신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종찬의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하지만 영화 전체의 흐름과 튀지않게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것은 송강호의 훌륭한 능력이 아닐까 싶다. 전도연과 송강호를 보고 있자면 영화를 완성하는 데 배우가 얼마나 커다란 공헌을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 이후

의도하지 않게 '밀양'을 본 후 바로 연달아 '숏버스'를 봤다. 마치 무슨 영화인의 하루처럼 숨돌릴 틈없이 이어봤다. 게다가 '밀양'과 '숏버스'는 연달아 보기에 상당히 힘든 영화였다. 의도하지 않았다니까. '밀양'의 감동을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또 다른 종류의 '충격'에 노출되어서 정신없는 하루였다. 오랜만에 마음껏 영화를 보긴 했지만 좋은 영화는 천천히 그리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감동을 즐겨야하는데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