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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시대와 국가에 의한 잔인한 상처와 고통을 개인은 어떻게 극복해가는지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 개인들을 바라보는 후대의 평가가 재미있다. 한때는 내 존재가 뜻하지 않게 다른 존재에게 엄청난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고통을 개인이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아버지의 깃발>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얼뜨기 정치인들은 전쟁자금을 모으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영웅은 단지 그들이 만들어 내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 어디에도 영웅은 없다. 그러나 전쟁시에는 모두가 영웅을 만들어 내고 싶다. 영웅으로 인해 영원히 안락한 삶을 영위하길 바란다.
그러나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한, 믿을 수 없이 참혹한 전쟁터에서는 영웅따위를 자처하는 사람은 없다. 개인의 능력을 비웃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길이란 없다. 그들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다. 단지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영웅이고 뭐고, 어느 곳이든 총과 포탄이 없는 곳이라면 천국이다.
하지만 그들의 국가는 죽을 때까지도 그 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거짓 영웅의 탈을 씌우고 전 국민을 상대로 앵벌이를 만든다. 그 젊고 아까운 목숨을 전쟁터로 내몬 것도 모자라, 그들의 아픔 따위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눈만 감아버리면 다행이지, 이미 치유하기 힘든 상처에 죄책감과 죄의식 그리고 부끄러움을 덧씌운다. 상처를 덧내고 덧낸다. 그렇게,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 한 번 볼 수 없는 영웅을 만들어 버린다. 기껏 술 한잔 사주고는 나몰라라 한다. 운 좋게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살아왔지만 결국은 객사하는 '아이라 헤이즈'는 그 시대 모두의 잘못이다. 영웅에 눈이 멀어 미친듯이 박수를 쳐댄 모든 사람들의 잘못이다.
어쩔 수 있었겠는가. 영웅에 대한 그 값싼 존경심이 진심인 순간은 있었으리라. 저 뭉클한 사진이 전해주는 아림은 진심이었으리라. 그들의 박수는 진심이었다. 이내 잊어버렸을 뿐이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상상할 수 없없을 뿐이다. 전쟁터가 아니라도 자기 한 목숨 지켜내기 힘든 세상 아닌가. 사람들의 건망증을 알고 영웅에 대한 헛된 환상을 꾸며낸 개떡같은 시대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작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얼마나 대단할 것일까.
클린튼 이스트우드 감독이 바로 그 작은 개인이다. 미국의 영웅주의를 해체하고 개인의 고통과 아픔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아버지의 깃발'만으로는 그리 새롭지 않다. 전쟁의 참혹함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이오지마 전투신과 세 명의 영웅들의 아픔과 상처에 섬세하게 귀를 기울이는 연출력은 물론 훌륭하다. 하지만 싸움판에선 양쪽 이야기를 모두 들어봐야한다 하지 않는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함께여야 주제가 완성된다. 아마도 영웅주의를 해체하는 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으리라. 그 어느 쪽이든 개인이 겪어야 했던 시련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누구를 '위한' 전쟁은 없다. 개인의 처절한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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