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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 처음으로 내가 아닌 사람의 감정 혹은 감각을 느껴보고 싶었다. 벌로 반 전체가 손바닥을 맞게 되었는데, 내 차례가 다가올 수록 긴장되었다. 크게 아프지 않다는걸 아는데, 손바닥을 맞은 친구들의 표정이 날 긴장시켰다. 내가 저 아이의 감각을 대신 느낄 수 있다면, 혹은 내 순서에 나 대신 누군가가 고통을 대신 느껴준다면.
그러다가 혼란에 빠졌다. 그렇게 되면 '나'가 과연 존재할까? 서로가 감각, 생각을 혹은 감정의 절대적 크기를 나눌 수 있다면 세상에 나는 없었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기분이 너무 이상해져서 손바닥을 맞은지도 모르고 있었다.

애를 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각, 감정, 감각을 가늠해 보려고 하지만 모른다. 기껏해야 아는 척 정도다. 가끔씩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때면, 반사적으로 상투적인 위로를 한다. 전혀 소통되지 않는, 입 안에서 이미 부서진 말들이 나도 모르게 흩어진다. 가끔은 창피하고, 가끔은 아무렇지도 않다. 부끄럽지만 아직 누군가를 대신해 아프고 싶은 적도, 슬프고 싶은 적도, 절망하고 싶은 적도 그 어떤 부분에서도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대신하고 싶은 적이 없다.

그래서 소통이라는 것이 가끔은 의심스럽다. 가능한 일인가? 너를 이해한다는게 과연 가당키나 할까? 널 위로하고 내가 위로받을 수 있을까?

소통이 현실 자체를 바꿀 순 없지만 삶을 견디는 힘이 된다.
 
드레스덴 폭격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고 말을 잃어버린 할아버지는 곁에 있는 할머니를 사랑할 수가 없다. 9.11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오스카는 아버지 없는 세상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밉다. 아무리 많은 발명품으로 세상을 채워도 채워도 모자르다. 하지만 오스카는 아버지와 전혀 상관없는 뉴욕의 블랙들을 만나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삶을 견디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힘을 전한다. 엄마의 슬픔을 이해하고 아버지 없는 세상을 견뎌낸다. 세상 속의 개인들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조금씩 힘을 얻어 살아간다.

삶은 지속된다. 세상은 잔인하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한다. 개인이 견뎌야 할 아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모두가 그 고통을 이겨내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진다는 옛말을 거짓이다. 누군가는 그 시간을 송두리째 자신을 할퀴는데 사용한다.

소통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했다. 우리는 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그리고 그들을 잃고도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사랑한다 전할길 밖에. 그러면 우리는 모두 무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