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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영화

<영화> 컨택트

플라밍고 2017. 2. 20. 23:54

 (스포일러 주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좋아한다. 특히 공간. 

그리고 개인의 선택에 대한 주제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실존적 선택. 박사 논문의 주제도 '선택'에 관한 것이다.

게다가 한 가지 현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상담자로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도 내담자에게 이 '해석'의 다양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영화 '컨택트'는 내가 가장 관심 있어하는 개념이 모두 들어가 있다.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흡족스러운 영화다.

 

#1. 비선형적 시간

과거-현재-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헵타포드는 비선형 언어를 사용한다. 이들은 메시지를 한번에 전달한다.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든다. 삶의 유한성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론 인간을 조급하게 만든다. 주변을 둘러볼 것도 없이, 내가 그렇다.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를 희생하거나 과거를 후회하느라 현재를 갉아먹기 일쑤다. 머리로는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도, 무엇이 현재를 사는 것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에 갇혀 쉽사리 고통받는다. 우리 모두가 삶의 유한성으로부터 겸손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우린 누구나 때때로 그 조급함으로 인해 불안에 매몰되어 허우적 거린다.

하지만 과거-현재-미래의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미래를 준비할 필요도 과거를 후회할 필요도 없다. 모든 시제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이 순간에 충실한 것 이외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할 수 없음'이 너무나 안심이 된다. 삶에 대한 부담이 한결 덜하다.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면 인과관계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동화 '개미와 베짱이'이의 '교훈'으로부터 해방이다.

 

#2. 실존적 선택

"만약 당신 생애를 모두 알게 된다면 당신의 삶을 바꾸겠습니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영화의 여주인공 루이스는 딸을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또다시 딸을 잃게 될 것임을 알고나서도 삶을 바꾸지 않는다. '상실'은 인간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지만 '상실'이 괴로운 이유는 아름다운 추억때문이다.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은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기억을 지우고자 하지만 '고통'만 지울 수는 없음을 알게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실은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사랑은 반드시 상실의 고통이 전제될 수 밖에 없다. 행복이 클수록 상실의 고통 또한 크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행복을 포기할 것인가, 설사 고통스럽더라도 행복을 경험해볼 것인가. 단연코, 후자다. 예전의 나는 꽤 자주 상실을 피하기 위해 행복을 포기했으나 지금은 생각할 것도 없이 후자다. 왜냐하면 어차피 상실은 내 힘으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영화와는 상관없지만, 개인의 위대함 중에 하나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은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간다는 것인데,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삶의 의미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미 중에 행복이 섞여 있지 않을까. 내가 상담 첫 회기에서 내담자에게 잊지 않고 부탁하는 것은, 고통스럽더라도 부디 견뎌달라는 것이다. 종교는 없지만 내가 호소할 수 있는 것은 믿음 뿐인데, 그 고통 속에서 분명 그가 의미를 발견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긍정성을 토대로 한 믿음이라기 보다는 그거라도 찾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의미(혹은 행복)를 찾지 않을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깝다.

#3.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루이스는 언어학자이다. 루이스는 하나의 단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음을 말한다. '무기'는 '선물'이기도 하고, '총'은 위협일수도 딸과의 즐거운 놀이일 수도 있다. 외계 비행물체는 전 세계 12곳에 흩어져 나타났고, 모두의 언어가 다르고,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해석하고 접근하고 반응한다. 이는 바벨탑을 떠올리게 하는데, 영화에서 불통은 언어 때문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현상을 겪더라도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경험을 하는데, 각자가 자신의 경험을 '사실'로 확신할 때 더이상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의 의도를 가늠하고, 오해하고, 확신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내가 삶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해석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인데, 분노, 증오, 환희, 사랑 등의 강렬한 감정에 빠져버리면 그 해석의 가능성이 닫혀버리는 것 같아 정서에 접촉하는 것을 매우 경계해 왔다.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다. (하지만 요즘도 여차하면 감정에 휘말릴까봐 경계하느라 오히려 시야가 좁아지기 일쑤다.) 차라리 제대로 느끼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경험을 조율하는 것이 풍부한 가능성을 담아내는 방법임을 이제는 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두려움이 편견을 만든다. 그리고 그 편견이 폭력을 부른다. 어른들 말씀은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주옥 같은지. 영화에서 루이스는 결국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고, 장군과 소통한다. 인간이 외계인이 지구에 온 이유를 이해하고 나서야 외계인은 바람으로 파도로 흙으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마냥 사라진다. 우린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인해 서로를 오해하고 증오할 수 있고 세상을 원망할 수 있지만 영화는 '소통' 즉,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서 희망을 찾는다. '소통'만이 함께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낡고 낡은 메시지를 지루하지 않게 진부하지 않게 단순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전달한다. 이는 드니 뵐뇌브의 훌륭한 연출 덕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