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느낌/영화

<영화> 무뢰한

플라밍고 2015. 6. 13. 15:23

 

 

 

 

 

#1. 여자의 이야기

 

전도연이 연기한 김혜경의 진가는 재곤과 함께 잡채를 먹는 장면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다.

 

'진심일까, 믿어볼까'

믿어지지 않지만 믿어보고 싶은 절박함,

이 지긋지긋한 인생을 저이가 구해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희미한 기대감과 

그 희미한 기대감에 모든 것을 걸수도 있을 절박함이 지나간다.

하지만 그 기대감 아래 줄기차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삶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깔려있다.

상처 위에 상처가 쌓이고, 기억하기 싫은 기억에 또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 덮힌다.

김혜경은 줄곧 기대가 절망으로 이어졌음에도 끝내 그 기대를 놓치 않는다.

 

"나, 김혜경이야!"라고 사납게 굴다가도,

허무하리만치 모든 것을 박준길에게 맡겨버리는 수동성이 처연하다 못해 참담하다.

 

준길을 죽인 재곤은 혜경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원수만은 아니다.

재곤은 혜경의 절박한 믿음을 배신했고, 

결국 그녀의 삶에 기억하기 싫은 절망을 더했고,

더군다나 희미하게나마 기대했던 '다른 삶'을 끝내버렸다. 

혜경에게 재곤은, 그의 진심이야 어찌됐든,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도 잔인하다.   

 

 

#2. 남자의 이야기

 

김남길이 연기한 정재곤 캐릭터의 핵심은 형사 선배와 대화 장면에서 나타난다.

형사를 하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일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형사와 범죄자를 더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란다.

재곤은 늘 그렇게 그 경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형사'를 한다.

재곤은 형사와 범죄자 사이, 참과 거짓 사이, 옮고 그름의 사이에서 위태롭게 서있다.

그가 그리도 그 경계에서 경직되어 있는 이유는, 자신의 감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재곤은 그 혼란스러움을 해결하기 위해 범인 검거에 더 몰두하는지도 모른다.

마치 몸은 컸는데, 마음은 아직 혼란스러운 사춘기 남학생 같은 느낌이랄까.

시간이 가늠되지 않는 장면들은 자신을 규명할 수 없어 혼란스러운 재곤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런 재곤에게 혜경이 보인다.

혜경의 괴로움이 보이고, 혜경의 아픔과 고통이 보인다.

혜경을 통해 재곤은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혼란스러울까봐 안절부절 못하던 이 남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혼란을 경험한 후 달라진다. 

그 대가가 컸지만 재곤은 자신이 찾아 헤매던 것을 찾았다.

 

  

#3. 영화 이야기

 

느와르 장르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시퍼렇고 서늘한 새벽의 느낌과 섬뜩한 뒷골목의 풍경이 배경을 충실히 그려내고,

배우들의 섬세한 표정이 그 특유의 참담함을 잘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재곤과 재길의 액션씬은 맨몸으로 부딪쳐 내는 투박함이 인상적으로 드러나고,

민 실장의 비열함, 형사 선배의 찌질함이 '이 지긋지긋한 인생'이라는 고통을 더 생생하게 만든다.

 

전도연은 누가 봐도 참담한 삶을 살아내는 단편적인 김혜경 캐릭터에 섬세함을 불어넣어 다채롭게 만들었고,

김남길은 누가 봐도 투박하고 강한 마초의 정재곤 캐릭터에 연약함과 혼란스러운 아이의 느낌을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