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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영화

<영화> I am love

플라밍고 2011. 1. 23.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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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영화 리뷰를 쓰고 싶은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옥희의 영화' 이후 오랜만에 본 영화였는데 상당히 좋았다. 배고픈 배를 부여잡고, 찬 바람을 뚫고 씨네큐브를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이 영화하면 모두가 주인공 틸다 스윈튼의 연기를 극찬하던데, 그럴만 했다. 이탈리아 상류층 재벌가문의 안주인인 엠마는 아름답고 절제된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 우아함

엠마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화려했다면 그녀의 고독과 결핍이 잘 표현되지 않았을 것이고, 지나치게 절제하고 단순했다면 그녀가 지닌 폭발적인 열정이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풍성하고 깔끔한 금발, 단순한 헤어밴드, 심플한 디자인의 몸에 잘 맞는 의상, 자상하고 수용적인 미소, 우아한 걸음걸이 특히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의 그 종종걸음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적당한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는 매너,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생기를 뺀 표정 등은 엠마가 누구인지를 잘 설명해 주었다.

예술품을 모으듯 아름다운 엠마를 러시아에서 수집해 온 남편은 그녀에게 엠마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탈리아 명문가 안주인으로 꾸며놓았다. 그녀는 러시아인임을 지우고 남편의 아름다운 인형으로 완벽하게 자신을 맞추어 살아왔다. 틸다 스윈튼은 정말이지 고풍스러운 예술품처럼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엠마와 그녀의 시어머니 그리고 아들의 여자친구와 함께 안토니오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씬이 있는데, 엠마가 새우 요리를 음미하는 장면이 참 좋았다. 매혹적이고 우아한 엠마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꺠우는 장면이었다. 마치 연극처럼 이들의 식탁에 조명을 꺼서 엠마를 제외한 인물들은 어둠 속에 몰아넣고, 새우 요리에 빠져버린 엠마에게만 핀조명을 밝혔다.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에게 반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씬이다. <아이 엠 러브>는 <어톤먼트> 이후 우아함에 반해버린 영화이다. 키이라 나이틀리, 케이트 블란쳇, 틸다 스윈튼... 우아함을 가장 잘 표현하는 여배우들인 것 같다.


# 열정

이 영화는 자신을 지우고 완벽하게 상류층 가문의 안주인으로 인형처럼 살아온 여인의 알수없는 결핍감과 고독감을 잘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아들의 친구인 안토니오를 만난 후 엠마는 그동안 잊고있던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깨닫는다. 하지만 엠마의 변화가 급작스럽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전에도 엠마의 의상을 통해 엠마의 캐릭터 변화에 개연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엠마의 의상은 심플하고 편안하게 몸에 잘 맞는 디자인이었으나 색감은 원색적이었다. 빨갛고 파란 드레스, 주황색 바지, 빨간 입술, 화려한 선글라스 등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과 대조적으로 의상은 그녀의 숨겨진 욕망과 열정을 보여준다. 안토니오를 찾아가 섹스를 하게 된 날 입었던 주황색 바지도 엠마에게 참 잘 어울렸다. 그리고 이전의 무표정과 긴장된 몸짓, 불안한 걸음걸이 등과 대조적으로 그 날의 엠마는 생기 넘치고 편안했다. 엠마의 감정 변화에 어울리는 틸다 스윈튼의 섬세한 연기도 좋았지만 엠마를 표현하는 의상, 엠마의 감정에 따라 변하는 음악이 캐릭터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

감독은 캐릭터의 미묘하고 섬세한 변화를 부드럽고 디테일하게 표현하였는데, 이 때문에 영화가 이토록 우아하면서 동시에 열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산레모에서 엠마와 안토니오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상당히 에로틱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엠마의 욕망을 격정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엠마가 안주인으로 살고 있던 밀라노는 톤을 어둡게 하여 답답하고 칙칙했다. 반면 안토니오와 만나 사랑을 만나는 곳인 산레모는 화사한 햇빛, 아무렇게나 자란 싱싱한 풀과 나무들이 가득한 평화롭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연출했다. 산레모는 엠마가 남편이 준 '엠마'가 아닌 진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다. 그들의 정사씬도 자연 속에서 주변의 곤충, 풀, 나무, 햇살과 어우려져 자유롭고 열정적이며 우아하게 표현되었다. <해피 엔드>, <색계>와 함께 기억에 남을만한 정사씬이다.


# 절박함

모든 것을 다갖춘 여인의 불장난이 아니다. 안토니오와의 사랑을 고백했을 때, 남편은 엠마에게 "넌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한다. 엠마는 그렇게 살아왔으리라. 자신을 잊은채 아무것도 아닌 인형으로 그렇게 살아왔으리라, 자신조차 자기가 무엇을 잃었는지 모른채 열심히 남편의 수집품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엠마가 불행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안토니오를 통해, 그의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요리를 통해, 자신이 잊고 있던 부분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녀는 '엠마'를 탈출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키티쉬'를 기억해 낸 순간 더이상 '엠마'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만큼 그녀는 사실 열정적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엠마를 버리고 밀라노의 대저택을 미친듯이 탈출하는 그 장면도 무척 인상적이다. 딸 앞에 서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절박한 눈빛으로 자신의 선택에 대해 이해와 허락을 구하는 절박한 눈빛, 이보다 더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다시 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목이 지그시 눌린다. 늘 완벽한 스타일링으로 무장했던 엠마가 아무렇게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더군다나 맨발로 저택을 탈출할 수 밖에 없었던 절박함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흡족한 자극이다. 초반에 살짝 졸았는데, 그것이 좀 아쉽다. 어렸을 때는 그 아무리 재미없는 영화를 봐도 졸지 않았는데, <하얀 리본> 이후 영화를 보면서 졸기도 한다. 내 나이가 많지는 않은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싶다. 자연의 섭리라면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는가. 하여간 <아이 엠 러브> 덕분에 오랫동안 일지않던 영화 리뷰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다. 더불어 재미가 생겼다. 한참을 별 재미없이, 자극없이 지냈는데 보고 싶은 영화도 생기고, 읽고 싶은 책도 생기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생겼다. 뭐.... 워낙에 변덕스러운 기질을 타고났으므로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나름 말랑말랑해진 느낌이 좋다. 다음엔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다. 따뜻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