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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영화

<영화> 엘라의 계곡

플라밍고 2010. 1. 22. 14:02



오랜만에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였다.
인종차별에 관한 폴 해기스의 전작인 '크래쉬'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잘은 기억이 안나지만 인종문제를 소재로 그보다 근본적인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엘라의 계곡' 역시 인간성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했다.

이라크 전쟁에 파병된 아들의 실종 소식을 듣고 군인 출신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다.
초반에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어버지가 자랑스러운 아들의 실종과 죽음을 파헤쳐가는 가면서 범인을 찾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누가 아들을 죽였는가?'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아들이 왜 죽었는가?'를 말하고 있다.
영화 후반에는 순진하고 어린 아들이 어떻게 괴물이 되었가는지를 보여준다.





제목 '엘라의 계곡'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움을 벌이는 장소이다.
엘라의 계곡을 가운데에 두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대치한다.
팔레스타인의 골리앗은 엄청난 거구의 무서운 괴물이다.
이스라엘 왕은 골리앗을 물리치는 사람에게 큰 상과 자신의 딸을 줄 것을 약속하고,
어린 아이인 다윗이 새총과 돌맹이 5개로 골리앗을 물리친다. 

영화에 대입하자면, 다윗은 군인이고 골리앗은 전쟁이다.
전쟁 자체가 괴물이다.
살기 위해서는 죽일 수 밖에 없는, 인간성을 지켜낼 수 없는 전쟁터가 곧 괴물이다.
설사 어린아이가 차 앞으로 뛰어든다고 하여도 차를 멈출 수 없다.
멈춰서면 게릴라군이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살기 위해서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야만 그 상황을 견딜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터의 수많은 어리고 순진한 다윗들은 자신의 인간성을 조금씩 버리고 괴물이 되어간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이를 치어서 길바닥에 무참히 버려지게 한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그 어떤 명분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이가 아니라 개였다고 부정해버리는 것이 고작이다.
그들은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인간성을 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괴물이 되었음을 비난할 수 있을까.
순진하고 어린 다윗이 전쟁이라는 엄청난 괴물 앞에서 두려움을 극복하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내온 사진들은 모두 구호의 메시지였다.
전쟁이라는 괴물에 먹혀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아들의 구호의 메시지였다.
두려움에 맞서 용감히 나라를 지키는 것이 사내대장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죽여야 하듯이,
범인은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동료를 죽였다고 하고,
이미 그 과정이 너무나 당연해진 그들은 심지어 허기마저 느꼈다고 했다.
그들에게 어떻게 동료를 죽이냐고, 마약에 빠질 수 있냐고, 생포한 포로를 고문할 수 있냐고 따져물을 필요가 있을까?
그들에게 인간성을 지켜낼 용감함을 강요하기보다 괴물이 되어야 살아남는 상황에서 그들을 구조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우린 누구나, 아주 손쉽게 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엘라의 계곡'이 인상적인 가장 큰 이유는 영화의 시선이 비난이 아니라 반성이라는 점이다.
단단한 애국심을 가졌고 인종을 차별하는 아버지도, 추악하게 변해버린 아들 및 그들의 동료도, 자신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남편의 폭력성을 고발한 부인을 무시한 형사도, 여자라서 무시하는 여성차별적인 남자형사들도 그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나 역시 언제든 그중 누구일지 모른다.

영화는, 누군가의 절실한 구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묻고 있다.
나의 안위 혹은  나의 인간성이 누군가의 절실한 메시지에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지켜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묻는다.
하지만 영화가 비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엘라의 계곡'은 괴물이 되어버린 다윗의 모습을 통해 절망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괴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괴물을 무찌르고 용맹한 다윗으로 살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상황 속에서 개인은 너무나 무력하고 한계가 있지만 그 상황이 변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개인의 위대함이기도 하다.
과연 그 위대함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믿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