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공간

<전시>모딜리아니와 잔느展

플라밍고 2008. 1. 14. 01:13



눈 온 뒤 무척이나 추운 토요일 오후에 <모딜리아니와 잔느전>에 다녀왔다. 일산 아람미술관은 처음이었는데 아담하고 조용하였다. 시장통 같은 시립미술관이나 예술의 전당에 비해 훨씬 느긋하고 여유있게 관람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시립미술관의 <고흐전>에 실망했던터라 더욱 그러했다. 이번 전시는 총 5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만남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랑에 초점을 두고 나뉜다. 유화보다는 드로잉이 많이 전시가 되어 있지만 드로잉 역시 워낙 훌륭하기때문에 재미있었다. 특히 관장님같은 분이 그들의 재미난 일화를 곁들여 그림을 소개해주셔서 더욱 흥미있게 관람할 수가 있었다. 눈이 채 녹지 않은 차가운 날씨와 그들의 치열하고 열정적인 사랑과 삶이 무척이나 잘 어울려서 더욱 재미있었다.



아마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이탈리아 고전미술과 철학의 전통에 뿌리를 둔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품위와 강한 자긍심을 지녔던 모디. 그는 20세기 초 다양한 미술사조가 혼재하던 유럽의 미술계에 휩쓸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모색했다.
모디는 조각가 브랑쿠지, 키슬링, 수틴, 피카소, 르느와르와 교제했으며, 멕시코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그의 연인 러시아화가 말레브나 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는 에콜드 파리의 상징적 존재로 이탈리아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20세기 초 파리에서 고독한 영혼을 예술로 꽃 피웠다.
그의 작품은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 등을 잘 표현해준다. 특히 그의 초상하는 모델의 개성을 빈틈없이 잡아내면서도, 대상을 단순화하거나 보편화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아프리카 원시조각에 영향을 받은 듯한 긴 목의 여인은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혹자는 모디가 미술사상 가장 잘생긴 화가라고 평하기도 하는데, 특히 그의 지독히 외로워보이는 큰 눈은 보기만해도 여성들의 모성본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람미술관)


잔느 에뷔테른(Janne Hebuterne, 1898-1920)

천재화가 모딜리아니가 병으로 운명하자 잔느 에뷔테른은 이틀 뒤 8개월 된 아이를 임신한 채 아파트에서 투신해 자살하고 만다. 우리에게는 모디의 수많은 여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만 회자되어오던 그녀의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건 불과 10년이 채 안 된다.
그러나 그녀의 기묘한 눈빛과 신비한 매력은 모디의 대표적인 초상화를 통해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고개를 갸우뚱 하고 목이 긴 여인. 그녀가 바로 모디 초상화의 대표적인 주인공, 잔느 에뷔테른이다.
18세의 나이에 이미 32세의 모디의 예술적 재능을 인지하고 존경했던 그녀는 14세 연상의 모디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죽을 때까지 그의 예술적 동료와 연인이 되었다. 그녀에게 모디는 예술적 스승을 넘어서 삶 자체였고 그가 더 좋은 작품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강인한 희생정신과 성숙함을 지닌 여인이었다.
초기에는 거친 붓터치와 강한 색상을 사용해 주로 풍경화나 정물화 작업하는 야수파적인 작업을 하다가 모디를 만나면서 서로의 예술적 지향점이 유사하다는 것을 터득하고 인물화 위주의 작업으로 전환한다. 2000년 10월 베니스에서 열렸던 몽파르나스 화가들의 그룹전시 <Modigliani & his circle>에 처음으로 그녀의 그림이 소개되었는데, 당시 몇 점의 정물화 및 풍경화를 제외하고 대부분 생생한 성적묘사가 두드러진 셀프누드화였다. 이는 작품제작 당시 금기시되었던 과감한 성적묘사로 부르주아의 질서를 위반한 것이었다. 당시 남성의 시각을 통해 표현된 전형적인 표현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여성스스로 자신의 누드를 거침없이 표현했다는데 당혹함을 느꼈을 것이다.
모디의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여인으로만 알려졌던 그녀는 사실은 넘치는 예술적 에너지와 자신의 선택에 후회없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이었다. (아람미술관)



전시구성


#. Section 1 ; 몽파르나스의 화가 모디와 잔느

모디와 잔느는 1916년에 몽파르나스 미술학원에서 만난다. 이번 전시회에는 모디가 잔느에게 선물한 그녀를 그린 드로잉 두 점이 전시되어있다. 이 몽파르나스 학원은 많은 화가들의 교우의 장소였다고 한다. 첫 번째 섹션은 주로 잔느의 그림으로 구성되어있다. 잔느의 초창기 작품으로 인물화 정물화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일러스트 같은 느낌도 있고 소녀다운 동화같은 귀여움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브루타뉴 여인>



<자화상>




#2. Section2 ; 몽파르나스에서 피오난 사랑

몽파르나스에서 1918년까지 함께 작업하면서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있다. 이 시기의 잔느의 작품으로는 세탁선(건물이 낡아서 세탁선만큼 삐걱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라 불렸다던 그들의 작업실에서 밖을 내다 본 유화들이 전시되어있다. 모디(모딜리아니의 친구들이 붙여진 별명으로, 재능있는 불운한 화가라는 뜻이라고 한다.)의 이 시기 작품은 그의 독특한 화풍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기이나 목이 길고 우아한 자태의 여인 초상화가 등장한다. 이 전시회에는 <산호목걸이를 한 여인>을 볼 수 있는데 청색과 붉은색의 대비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보통 우울함을 나타내는 청색을 사용했음에도 그에 묻혀버리지 않는 여인의 단단한 자의식이 느껴지는 당당한 그림이었다. 모디의 청색은 당시 피카소의 청색시대와는 달리 대상의 당당함을 잠식하지 않는다. 가난하여 물감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색감에 대한 그의 자신감과 대범함이 물씬 느껴졌다.
 


<산호 목걸이를 한 여인, 모딜리아니>  


<Pichet bouteile et fruit, 잔 에뷔테른>

모딜리아니와 함께 작업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긴 목과 둥근 어깨는 모디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좀 더 복잡하고 섬세한 느낌이 있다. 이 전시에서는 잔느의 드로잉이 꽤 많았는데, 잔느의 드로잉은 모디보다 생동감이 있고 감정적이었다. 모디의 드로잉이 간결하고 힘이 넘치고 대상의 전반적인 느낌을 함축했다면 잔느의 드로잉은 인물의 표정에 보다 충실하여 순간적으로 넘실대는 감정을 포착한 느낌이다. 모디가 대가다운 대범함과 단순함으로 남성적인 느낌이라면 잔느는 세밀하고 복잡한 여성적인 느낌이었다. 공통점은 선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 특히 모디의 경우 전시되어 있는 대부분의 드로잉이 선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선의 강약만으로 리듬감있게 표현했을 뿐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무엇을 표현해야할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명쾌했다.








<수틴의 초상화, 잔느 에뷔테른>
 




















#.Section 3 ;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니스

모디의 건강이 악화되어 화상인 즈보로우스키의 권유로 모디와 잔느는 남프랑스 니스로 요양을 간다. 당시 파리는 독감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약 2년 간 니스에서 생활하는 동안 첫째 딸 잔느 모딜리아니를 낳았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상당히 밝고 화사하여 예뻤다. 특히 <어깨를 드러낸 잔느 에뷔테른>은 너무나 예뻐서 한동안 머물게 했다. 생생한 피부와 정말 반짝이는 것 같은 고운 머릿결을 표현한 색감은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잔느는 머리카락 색이 코코넛을 닮았다하여 코코넛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도슨트의 설명으로는 이 그림에서의 머리카락 색은 표현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색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모디 특유의 화풍이 완성되어 보이는데, 살짝 고개를 돌린 자세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우아하게 뻗은 긴 목과 동구란 어깨는 사랑스럽기 그지없고, 발그레한 볼과 신비한 눈동자와 표정에 대한 표현에서 부인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그들의 행복이 잡히는 듯 했다.



<어깨를 드러낸 잔 에뷔테른,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와 잔느 에뷔테른>

모딜리아니와 잔느가 함께 그린 그림이다. 임신한 잔느와 그 손을 꼭 잡은 모디의 행복한 모습니다. 파리에 대형 백화점에 매장을 가지고 있었던 잔느의 집안은 중산층 이상의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모디는 이탈리아에서 쫄딱 망한 가난한 유태인이었기때문에 둘의 결혼은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게다가 모디는 술과 마약에 빠져 살았고 어려서부터 병약했다. 또 잘생긴 외모때문인지 여러 여성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었지만 잔느는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그와 그의 재능을 열렬히 사랑했다고 한다. 그들은 3년 밖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니스에서의 시간이 그들에게 더없는 행복이었을 것임을 한 눈에 보여주는 그림이다.






<목걸이를 한 노부인, 잔느 에뷔테른>

이 그림은 니스 시기의 잔느의 작품이다. 상당히 밝고 화사하였다. 가본 적도 없는 니스의 화사한 낮이 상상되어 그 공간에 속하는 기분이 들었다.































#. Section 4 ;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


이 섹션에는 1919년 니스에서 파리로 돌아와 1년 후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사망한 모디의 마지막 작품들과 그를 지켜보던 잔느의 작품들로 채워져있다. 파리로 돌아와 극심한 생활고와 악화된 건강에 시달리던 모디는 점점 성격이 괴팍해졌다고 한다. 결국 모디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다음 날 잔느는 자살하는 그림을 그리고 이튿날 실제로 임신 8개월의 몸으로 투신 자살하였다. 그렇게까지 함께 한 그들의 관계와 삶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지만 모디와 잔느의 열정적인 그림을 보면 어렴풋이 그런 관계도 그런 삶도 있겠거니 싶기도 하다.

모델을 인간적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눈동자를 그릴 수 없다고 하여 초상화에 눈동자를 제대로 그려넣지 않아 그림이 팔리지 않았다는 모디의 예술가적 철학과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완성한 뛰어난 재능을 알아보고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당시 여자로서 그림을 그리며 살기 힘든 시절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당당히 노력하던 신비로운 눈빛의 거침없이 당당한 매력을 지닌 잔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서로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고 함께 같은 길을 가며 서로에 대한 격려와 이해를 함께 했던 그들이 단 3년 간의 짧았지만 열정적인 삶이 부럽기도 하다.


<병상에 누워있는 모딜리아니, 잔느 에뷔테른>



<청색의 자화상, 모딜리아니>



<자살, 잔느 에뷔테른>




#. Section 5 ; 모디와 잔느의 삶과 사랑

이 섹션에는 모디와 잔느가 교환한 편지와 그들의 교우관계 그리고 잔느의 오빠가 잘라 놓은 잔느의 머리카락 등이 전시되어있다. 모딜리아니와 함께 가난하게 작업을 했던 피카소는 형편이 나아지자 당시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르느와르에게 모딜리아니를 소개했다. 모딜리아니의 재능을 알아본 후 그의 그림을 팔기위해 동부서주했던 레오폴드 즈브로우스키는 모딜리아니를 많이 도왔으나 그의 그림을 많이 팔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딜리아니는 시인 막스 쟈콥과 진심을 나누었다고 한다.



후기

갈증을 해소할만큼 충분한 그림을 볼 수 있는 전시회는 아니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설렘에 전 달 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화는 많지 않았지만 마티스와 마찬가지로 드로잉만으로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전시였다. 특히 잔느의 누드 드로잉은 모디의 드로잉과는 다른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누드 드로잉만으로는 개인적으로 잔느의 드로잉이 더 좋았다. 모디의 대가다운 간결함도 좋았지만 모디의 작품은 상당히 우아하고 고고했다. 순간적인 감정의 흐름보다는 더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개체의 존재감, 그 자체에 대해 함축적으로 표현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범하고 과감하게 형태를 생략하고 명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깔끔한 선은 그 강약만으로 리듬감과 자유로움을 표현했다. 그에 비해 잔느는 세세하고 구구절절하게 표현한다. 개체의 존재보다는 순간의 감정을 잡아낸다. 곧 사라지고 없어질 것 같은 역동적이고 열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대범하거나 게슈탈트를 나타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자신의 격한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해서 좋다. 모디에 비해 잔 선이 많고 명암도 많고 무겁긴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재미가 있었다. 유화에 있어서는 모디의 그림이 단연코 좋았다. 무엇보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신비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름으로는 모디의 색감이 달랐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기다랗고 우아한 선은 물론이지만, 빛이 부서지는 듯한 그만의 생생한 색감이 좋았다. 그 신비한 매력은 특유의 형태 뿐만아니라 묽은 듯하지만 전혀 가볍지 않은 부드러운 색감이 한 몫 하는 것 같다. 모딜리아니의 다른 유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유명전시회와는 다른 한산한 분위기와 성의있는 도슨트의 설명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날씨 덕에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시간과 공간을 가졌다. 새해를 맞아 처음 찾은 전시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올해는 재미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