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우리 할머니

플라밍고 2007. 5. 10. 14:22

홧병은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발행한 이상행동 분류체계인 DSM-IV에서도 Hwabyung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다. 대부분 홧병 환자는 자신에 대해 엄격하다. 실망스러운 자신을 인정할 수 없고, 용서할 수가 없어서 걸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 할머니가 홧병이다. 아주 오래된 병인데, 본인은 아주 힘들어하지만 그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이 불편할까봐 아주 신경쓰신다. 그리고 주위를 신경쓰고 조심하느라 병은 더욱 악화된다.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다. 할머니는 상당히 본인에게 엄격하다. 아침마다 가장 일찍 일어나서 깨끗이 씻고, 화장품을 단정히 챙겨바르신다. 옷가지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지 않게 늘 조심하시고,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있거나 하지 않으신다. 늘 바르고 정갈한 자세를 유지하신다. 게다가 한시도 쉬지않고 움직이신다. 더러운 것을 지니치지 못하신다. 내가 볼 땐 광이 날 만큼 반짝이더라도 늘 걸레를 들고 닦느라 바쁘시다. 또 큰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으신다. 자식들의 결함은 자신의 결함이라 생각하고, 일단은 자신부터 책망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애썼는데도 어긋나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화가나는 것이다. 홧병은 결론이다. 할머니는 남에게 보이는 삶을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느라 진짜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다.

근래 그 병세는 심각해졌다. 최근 할머니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허깨비가 보인다고 했다. 거울 혹은 유리에 비치는 자신을 보고 허깨비라 하는 것이다. 허깨비가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생각하신다. 그러니 늘 무섭고 불안해하신다. 거울에 사람이 비친다는 것을 인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만, 거울에 비친 자신만 인정하지 못한다. 그렇게 늙고 약한 본인을 인정하지 못한다. 아무리 설명해봐도 소용없다. 할머니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난 그런 할머니를 감당하지 못한다. 싫다. 할머니에게는 따뜻한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기 싫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들을 하기 싫다. 비난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기 싫다. 자꾸 그런게 아니라고 왜 모르냐고 다그치게 된다. 기껏해야 30살도 안된 내가 80년을 넘게 살아온 할머니를 꾸중하는 것 같아서 대화하기 싫다.

나를 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도 내 바람과는 너무나 다르고 부족한 나를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엔 인정치 않고 회피하게 된다. 그리고는 회피하고마는 모자른 나에대해 화가 난다. 자기비난이 상황을 인정했다고 볼 수 없다. 지나친 자기비난 역시 상황을 도피하고자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20대 초반에는 내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일에서든 최고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단지 아무도 나의 엄청난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대 중반에는 내가 특별할 수 있는 분야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타고난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인정해야 했고, 그들이 노력하는 동안 난 게을렀음을 인정해야 했고,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무한한 잠재력이라는 환상으로 도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힘들게 깨달았다. 나의 중요성에 대해 과대망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는 동안 자존심은 크게 상처입었고 절망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할머니와 대화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알았다. 난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고, 난 아직도 회피중이었다. 내 취약한 자존심이 무너질까봐 두려워서 도망쳤던 것이다. 그리고는 극복했다고, 성숙했다고 생각해버렸다.

할머니는 허깨비와 싸우는 중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란다. 내가 나를 극복하고 할머니를 도울 수 있길 바란다. 80이 넘은 나이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고 병들었지만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남은 시간 동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선택은 혼자서 하는게 아니다. 더 나은 선택이 분명 있고, 함께 도울 수 있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