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쓸데없는 넋두리

플라밍고 2022. 10. 1. 20:03

 

너무 하기가 싫다. 

5년 전이었다면 1-2주 만에 끝냈을 일을 지금은 2달째 끌어안고 있는 중이다. 

끌어안고만 있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하기 싫다고 안하고 있는 스스로가 참 짜증나면서도, 

지금도 이렇게 일은 안하고 농땡이를 부린다. 

 

과거에 비해 체력이 달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건 핑계다. 

예전처럼 아등바등하고 싶지 않고, 쉬엄쉬엄 편하게 살고 싶은 거다.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더니만 딱 그 짝이다. 

근데 사실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불안과 권태의 줄타기. 

늘 그 타령인데, 지금은 바쁜데 권태롭다. 

예전에는 권태롭기 싫어서 미친듯이 일을 했는데, 

지금은 미친듯이 할 일이 쌓여있어도 권태롭다. 

 

크게 세 가지로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권태로움이 느껴질만큼 일이 충분히 많지 않은 것이거나

2)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일로는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3) 더이상 일로써 만족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렇다면 3가지 해결방법이 있다. 

1) 내가 잘하는 일을 더 만들거나

2)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거나

3) 일이 아닌 다른 역할에 관심을 갖거나 (가령, 일이 아닌 관계)

 

그래서 이번 학기에 해결방법 1-2번을 시작했다. 

근데 너무 하기가 싫다. 

이게 아닌가?

남은 건 3번인데, 제일 자신이 없다. 

 

최근 친구와 싸웠다. 

보통은 일적으로 만난 사람이 아닌 이상 싸울 필요가 없는데,

최근에 하등 일과 관련없는 사람과 싸웠다. 

생각해보니 최근 몇년간의 싸움은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여러 관계에서 열받는 일은 많지만 굳이 싸우지는 않는데, 

유독 그 사람한테는 역정을 내게 된다. 

 

화가 난다는 것은,

기대가 좌절됐다는 의미인데, 

나에게는 어떤 기대가 좌절된걸까. 

 

만약 그것이 관심과 애정이라면, 

왜 나는 기대가 좌절됐을 때 서운해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할까. 

그러나 싸웠던 상황을 떠올려보면, 

당시 내가 기대한 것이 관심과 애정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어느 시점부터는 상대에 대한 분노보다도 나의 반응에 대한 실망과 부끄러움이 더 컸다. 

나의 후진 모습이 표출된 것이 짜증났다.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의 후진 모습을 발현시킨 상대에게 화가났다. 

만약 나의 기대가 관심과 애정이었다면 상대의 마음이 더 신경쓰였을텐데, 

나는 내가 보인 반응이 더 신경이 쓰인다. 

이토록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애적이라니. 

결국 나의 기대는 흠집없는 가면을 쓰는 것인가보다. 

후지다. 

 

그래서 3번이 제일 자신이 없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나는 아주 흔하게 후진 짓을 할 거고, 

그때마다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쳐야 할텐데, 

생각만해도 숨고싶을만큼 부끄럽다. 

 

아니, 나는 내가 후진 거 안다.

다만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나말고도 아는 사람이 생기는 것인데, 

그럼 부끄러워지는 빈도가 더 많아질거 아닌가. 

다들 그러고 사나 아님,

다른 사람들은 안 부끄럽나 아님, 

다른 사람들은 부끄러워도 견딜만 한가 아님,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경험하나

 

개념적으로도, 

외상 후 스트레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상 후 성장이 있으니까.

근데 일적으로 수행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부끄러움을 감내할 용기가 있는데, 

(왜냐하면 일적인 실패나 수행의 성과가 나를 흠집낼 수는 없으니까. 일적으로 실패하는 것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진심으로 실패는 성공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관계에서의 부끄러움은 상대적으로 버티기가 힘들다. 

 

결국, 

이놈의 부끄러움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 

3번을 시도하지 못한채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일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다. 

그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그가 필요로하는 변화를 시도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이니까. 

나는 누군가의 그 변화의 과정에서 더없이 반짝이는 그 사람만의 아름다움을 잘 발견해내지만,

그게 나한테는 잘 안된다. 

 

결국, 

나의 흠집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나만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나의 흠집에도 불구하고 나를 알아봐주는 누군가가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변화를 시도할 수 있고,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흠집을 보여줘야 그가 나를 알아봐주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 

그 경험의 기회를 원천봉쇄하고 있으니 늘 그 자리.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선순환으로 바뀐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어렵다는 것. 

 

어렵지만, 

인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희안한 계기로 느닷없이 변화를 꾀하기도 하니까

나도 뭔가 하겠지, 조만간. 

 

쓸데없는 넋두리를 1시간째 늘어놓다보니,

신세한탄도 지루하다. 

이제 할 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