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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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밍고 2017. 6. 14. 18:00

 

한번쯤 뒤통수가 깨질 때도 됐지.

벼락치기와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넘어왔고,

박사논문도 어떻게든 넘어가볼까 했는데,

안됐고, 안되겠다.

 

물론 박사논문 하나로 오래된 나의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연구를 하리라 믿어 의심치는 않지만

아직은 이 주제에 대한 질문을 하기에도 일정 수준의 지식이 쌓이지 않은 것 같다.

이전에도 모르지 않았으나 이 정도에서 만족하려고 했던 것이 생각보다 심히 창피하다.

 

대충 어거지로 심사를 받는 것도 죽기보다 싫지만

어거지로라도 심사를 받을 정도의 수준도 안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몰라도 나는 안다.

 

언제부턴가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을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변명하며 지냈던 것 같은데,

(때로는 그렇게 쉬기도 해야하지만)

지금부터는 다시 집요하게 스스로를 밀어붙여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창피한 게 싫어서 창피한 일 안 만들려고 해봤으나 그건 내가 통제할 수가 없었기에

창피해도 창피하지 않은 척 뻔뻔하게 굴었는데

지금은 뻔뻔할 여지도 없이 너.무.나. 부끄럽다.

 

수료 후 이것저것 일을 다양하게 벌여놓고

'나는 하는 일이 많았고 쉬지 않았고 하루를 바쁘게 살았다.' 등을 위안삼았다.

설사 이보다 더 열심히 살수가 없었음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 내용은 다를 수 있었고, 가치의 우선순위는 달라야 했다는 것 또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격려와 지지로 동기부여가 더 잘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곱게 자라지 못했는지 안타깝게도 실패와 좌절이 나를 더 꿈틀거리게 한다.  

앞으로도 곱게 살기는 그른 것 같다.

내 삶은 아무래도 투쟁의 역사, '분노는 나의 힘'인 것 같다.

 

다행히 개념적 설계는 마음에 쏙 들어서 실험적 설계만 새로 짜면 된다.

자주 나타나지는 않지만 급할 때 여지없이 나타나는 억척스러움으로 4-5월을 더없이 빡빡하게 보냈는데,

이또한 더 어려운 것을 피하기 위해 덜 어려운 것을 시도했던 것임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이왕 이렇게 된거, 더이상은 물러나지 않고 내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것을 하는 수밖에. 

결과야 어찌됐든 '대충했다는 부끄러움'은 다시는 안 겪고 싶다.

박사 들어온 후 오랜만에 정말 상당히 창피하다.

 

부탁하는 거, 신세지는 거, 약해지는 거 정말 싫은데...

부탁하고 신세지는 거야 백보 양보해서 어쩔 수 없다면,

적어도 사는 동안 약하게 굴고 싶진 않다.

다시금 억척스러운 시간 안에 나를 구겨넣어야 한다는 것이 참 싫지만

내 인생이, 내가 슬퍼지는 것보단 그게 낫다.

 

억척스러운 시간 안에는

여러 사람에게 낯뜨겁게 부탁을 해야 하는 것,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혹시모를 다음을 또 부탁해야 할수도 있으니 밉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상황이 꼬이면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상대가 민망하지 않게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

밥 먹을 틈없이 숨 돌릴 틈없이 퇴근 없이 24시간 팔다리는 물론 머리도 풀가동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접하기만 한 내 글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

더불어 조금이라도 덜 허접해질 수 있도록 다른 이들에게 난도질을 부탁해야 한다는 것,

즉 대처방안 없이 노화를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된다.

그래도 부끄러운 것보단 좀 늙는 게 낫...지...

 

신체적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타고난 세르게이 폴루닌도

인생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고 훈련에만 몰입했기에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데

나같은 범인은 타고나지는 못했을지언정 훈련은 해봐...야지...

마흔 전까지는 가리지 않고 따지지 않고 커리어를 쌓는 데 매진하기로 했으니,

그만 징징대고 다시 씩씩하게 성큼성큼 들어가야지.

 

그치만 만족스러울만큼 노력은 안했어도 인생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긴 했다......

결과가 병신 같긴 하지만 나름 그 과정에서 나였기에 이룬 성과도 있었다는 건 기억했음 좋겠다.

다음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