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찬 바람이 불면,

플라밍고 2016. 9. 12. 01:47

 

#1.

최근 한 달간 열을 올린 게임이다.

흰긴수염고래를 얻어보겠다고 어디서나 주책맞게 아이폰 화면을 두들겨댔다.

이만하면 됐다.

스마트폰 게임 중독, 온라인 게임 중독 등의 연구를 몇 편 하였으나 나는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도 중독은... 재능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뭘 할 줄 알아야 재미가 있지...

 

#2.

게임을 하다보니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슬슬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기온이 떨어지니까 느닷없이 정신을 차리고 신변을 정리하고 집중하기 시작한다.

인생은 다시 재미없어지고, 용돈벌이는 솔솔하다.  

어려서는 겨울을 참 좋아했었는데, 나이들면서 겨울엔 뼛속까지 추워서 찬 바람이 불면 겁부터 난다.

안그래도 집순이가 집밖으로 나갈 일이 더 줄겠다.

아침에 옷을 여러 개 입어야 하는 것도 귀찮다.

아, 겨울 싫어.

 

#3.

내 동생이 나의 일상을 가깝게 관찰하고는 '사포같은 인생'이라고 표현한다.

운동, 마사지, 미용 등 나를 위해서 시간과 돈을 쓰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

그 시간을 내기위해서 짜투리 시간을 빈틈없이 활용하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다. 

나에게는 '퇴근' 개념이 없다. 틈나는 대로 짬나는 대로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바쁘다고 징징대는 사람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바빠도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4. 

"내가 생각했던 상담하는 사람하고는 좀 다르네요."

"어떻게 다른데요?"

"상담이 뭔지 잘 몰라서..."

"따뜻하고 친절할 거라 생각하셨죠?"

"아, 네!"

"상담하시는 분들 중 따뜻하고 친절한 분들이 많은데, 저는 아니에요. "

 

봄이었다면 분명 보다 따뜻하고 친절했을 것이다.  

봄에는 나도 이해할 수 없을만큼 기분이 좋고, 마음도 몽글몽글 부드러워지니까. 

하지만 이해할 수 없을만큼 설레는 봄이 아니고서는 나는 대부분 까탈스럽다.

한 번에 못 알아 듣는 것 즉, 두 번 말하게 하는 것,

모호하게 표현하는 것, 순진하게 구는 것 등을 싫어한다.

순진하게 구는 것이란,

'나의 의도는 선한데 의도치 않게 부정적인 결과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라는 식의 태도를 말한다.

삶에 대한 나의 신화는,  

모든 현상에는 밝은 쪽과 어두운 쪽이 있고,

최대한 그 양쪽을 모두 생각하고 언행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사 그 영향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경험을 통해 학습해 나가고자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나는 의도치 않았으니 '나는 모른다.'라는 태도를 보면 딱 상대하기 싫어진다.

 

그래서인지, 겉으로 대놓고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을 그닥 믿지 않는다.

또다른 신화는 사람의 겉과 속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조금 까칠하더라도

자신의 호불호, 취향, 삶의 가치를 분명하게 하는 사람을 보다 신뢰하는 편이다.

 

아무튼 찬 바람이 부니까 더욱 까칠해진다.

찬바람 핑계라도 대보자.

그래도 나이가 들어서 좀 나긋해진거다.    

심지어 요즘은 겉으로는 나긋한 척은 한다.

 

#5.

사귀는 사람 아니면 새벽에 통화 안한다.

특별한 관계 아닌 이상 5분 이상 할 말 없다.

물론 봄은 예외다.

 

생각해보니,

내가 사람에게 반했던 현상의 공통점은 '봄'이라는 것이다.

매년 봄에 사람에게 반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반했을 때는 늘 봄이었다.

 

워낙 연애를 오래했던터라

누군가에게 반했던 일도 몇 번 없어서

공통점을 발견하기도 싶다.

 

유독 가을에 싱숭생숭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내가 상담하는 사람이기도 하니

내가 그 마음을 따뜻하게 들어줄거란 기대를 할 수는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아.니.다.

내가 당신한테 의지하지 않듯, 그만큼 거리를 유지해줬으면 좋겠다.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히 고통을 덜기 위해 나를 이용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모르는 척 하는 거지.  

모르는 척 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으나 요즘은 아.니.다. 

날씨가 조금만 더 추워지면 진정 정색할 수 있으니,

제발 그 전에 알아차려주길 바랄 뿐이다.

 

 


#6.

2100년에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된다면 멸종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 필요가 있나?

그냥 베짱이처럼 즐기며 살면 되지 않나?

근데... 안타깝게도 나는 안된다.

나는 열심히 바쁘게 사는 게 좋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좋고,  

누군가와 성장과 변화를 목격할 수 있는 나의 일이 좋다.

비록 개인적으로 특별한 관계들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 보람차다.

그래서 오히려 멸종이 가까워졌다는 주장이,

하루하루를 더 성실하고 의미있게 살게 한다.

 

#7.

파스쿠찌의 새 음료 중 비체린에 꽂혔다.

달지 않은 커피만 고수해왔는데, 비체린은 너무 맛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비체린 한 잔 사가는 게 참 좋다.

매일 지각하면서도 비체린을 포기하진 않는다.

(내 인생에서 지각이 대수로운 적이 없다.)

 

찬바람이 불면서

이유없이 마음을 설레게 하던 봄과 여름밤을 잊어간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사랑하던 한겨울의 따뜻함을 기억한다.  

다행히도, 차디찬 바람을 맞을수록 역설적이게도 더 따듯한 겨울냄새를 아직은 기억하고 있다.

 

#8

나는 점점 유연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중들 틈에서 나만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꿈을 꾸고,

퇴근 후에도 잠시도 쉬지 않고 쫓기듯 무언가를 하고 있고,

혹여라도 그냥 침대에 누우면 꿈속에서라도 작업을 한다.

늘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아등바등 거리는 일이 다반사고,

나는 내년 봄이 될때까지 점점 더 까칠해질 예정이지만

늘 그렇듯 무난하게 굴곡없이 버티고 있다. 

소식이 궁금했다면...  나는 비.교.적. 잘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