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겨울

플라밍고 2015. 12. 13. 23:59

 

 

 

이번 학기가 끝나면 수료이다.

언제나처럼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냈고, 어느덧 수료다.

별일 없다면 앞으로 일년은 또 정신없이 논문을 쓰고 졸업을 하겠지.

30살 이후부터는 큰 변화없이 계획한대로 커리어가 쌓이고 있다.

 

2007년 11월,

무턱대고 택시를 타고 서울대로 왔다.

특별수강 등록 기간이 지나서 공고를 확인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지금의 지도교수님을 찾아갔다.

결국 교수님을 만나뵙지도 못하고 돌아왔지만 그 다음 날도 나는 또 무턱대고 아침 일찍 서울대로 갔다.

그때는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했을까.

 

다음 날 운좋게 지금의 지도교수님을 만나뵈었다. 

미리 약속도 하지 않았고 무턱대고 학교 앞이니 만나달라고 전화를 했다.

당시 지도교수님은 특별수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1시간 동안 로스쿨 제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는 서류에 사인을 해주셨다.  

대체 왜 사인을 해주셨을까.

 

지금도 완전히 이해는 안되지만, 내가 참 절박해 보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당시 나는 나를 확인할 길이 전혀 없는 벼랑 끝에 서있었고,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비참했고,

그 고통을 벗어날 수 있으리란 기대없이 무참히 견디는 중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닐까봐, 실패할까봐 전전긍긍인 아픔이 아니었다.

그 고통은 그냥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세포 하나하나에 새기는 것이었다.

피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고, 가능한 것이라고는 오로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새기는 것뿐인 시간.

그 시간이 나를 택시에 태우고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를 찾아가게 만들었다. 

그땐 오롯이 나뿐이었다.

 

수료할 때가 되어서 왜 그 날이 생각이 날까.

마지막 학기는 거의 나사가 풀린 상태로 꾸역꾸역 마쳤는데,

지금 당시의 절박함이 떠오른다.

너덜너덜한 상태로 박사 코스웍을 끝내고 나니,

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잊고, 순간 모든 것이 지루해졌다.

한 학기를 방황했고, 방황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지 않아 쓸데없이 가면을 포장했지만,

난 그렇게 나를 숨기면서 충전을 한다.

 

사람들은 내가 늘 바빴고, 너무 많은 것들을 동시에 했고,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난 사실 힘들지 않으려고 바빴다.

나한테 가장 쉬운 것은 바쁨 속에 숨는 것이다.  

그 안에 숨어서 나를 숨기면서 충전을 한다.

나의 일상 속에서 늘 하던 것을 하면서, 적어도 내게 맡겨진 최소한의 책임은 지면서, 오래 걸리더라도 충전을 한다.  

 

2007년 11월의 절박함을 떠올리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는다.

이젠 더이상 내가 아닌 것을 느낄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행동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나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순진하고도 철없는 시도가 부끄럽지만,

부끄럽고 창피한 시간을 굳이 잊지 않는다.

난 역시 아직 아무것도 아니고 여전히 바닥이다.

그게 날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를 잊고 있었다.

나의 부자연스러움은 자유로움을 잊었기 때문이다.

 

다시금 하루를 살 수 있겠다.

다시는 그 고통을 직면하지 않겠다고, 멀어지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리석었다

나를 그 고통에서 살아 남게 했던 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는데.

두 번 말하는 거 제일 싫어하는 내가, 또 반복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난 다시 나의 자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