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아버지에게 배운 것

플라밍고 2015. 4. 11. 16:09

 

 

good faith, 르네 마그리트, 1964-65



친절함을 가장한 분노의 화신이었던 예전에도 이처럼 화사한 봄날에는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오랜만에 화창한 봄날씨를 만끽하며 여유롭게(?) 카페에 앉아있다. 


2년 전, 회사 다닐 때 팀장님이 회의시간에 김선생과 정선생의 다른 점이 무언지 아냐고 질문하셨다. 

동료들의 대답이 좀 충격적이었는데, 

김선생에게 말할 때는 긴장이 되고, 정선생에게 말할 때는 편안하다고 했다. 

김선생은 조리있게 말하지 않으면 질문을 해서 메시지를 명시적으로 만들려고 하고, 

정선생은 웬만하면 알아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뒤이어 팀장님이 생각하는 차이는 이렇단다. 

업무관련하여 김선생에게 화를 내면 김선생은 바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질문하고, 

정선생은 슬퍼한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른 채 단순히 '아, 나는 역시 편안한 사람은 아닌가보다'라고만 생각했다. 


지난 주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김선생이 잘하는 것 중 하는데, 

작년에 일을 같이 하면서 때때로 나의 불안감에 김선생에게 짜증내고 화를 낸 적이 있는데, 

그럴 때 김선생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나의 요구를 그 자리에서 반영해 주더라. 

그것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때떄로 나의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도 저 사람은 나와의 관계가 어긋나지 않도록 나를 버텨내주리란 신뢰가 생기더라. 

이어서 교수님은, 

본인의 짜증과 불안을 모두 김선생의 잘못으로 귀인하고 슬퍼했으면 다음부터는 김선생은 대하는 데 상당히 조심스러워졌을테고, 

일하기가 상당히 불편해졌을 것이라고 했다.   


그제서 이해가 되었다. 

내게서 신뢰는 상당히 중요한 가치이고, 관계에서 '신뢰'를 쌓는 것이 내가 노력하는 거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관계에서 신뢰란 당신이 나를 아끼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타인의  분노/짜증이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닌지 직관적으로 구분할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그 분노의 대상이 내가 아님을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 대한 그의 애정과 존중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라 여겨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나 역시 그 상황에서 두렵거나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서로를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여겨진다. 

그의 마음을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오해하지 않고, 

상대의 부족함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상담장면에서도 나의 이러한 특성이 내담자에게 자유로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문제는 나는 그들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고/정서/행동을 섣불리 오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당신과 나는 다르고 설사 당신에게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난 당신을 존중하고 우리 관계는 여전히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 

중요한 것은 우리 사이는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 

아마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을 주는 것일 수 있다. 


나는 당신과 나와의 거리를 좁힐 생각은 없지만(좁혀지지 않을 것이고 좁혀지는 것이 더 좋을 것도 없으므로) 

거리가 있더라도 우리 관계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내가 그 믿음을 내게서 그리고 타인에게서 발견하면서부터는 

나를 애써 포장하지 않고 있는 부족한 채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한동안 상담이 어떻게 개인에게 자유로움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는데,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안정적인 관계에 대한 신뢰가 그 시작인 것 같다. 

불분명하고 어렵게만 여겼는데, '애착'이 중요하긴 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