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불만
라울 뒤피(Raoul Dufy, 1877. 6. 3. - 1953. 3. 23.)
여차저차 1학기가 끝나간다.
아직 기말 페이퍼 2개가 남아있지만 선뜻 시작이 되질 않는다.
수업이 끝나서인지 과제가 정.말. 하기가 싫다.
수업의 여파가 컸는지 쉽게 털어지지가 않는다.
나의 강점이라하면 단순함 즉 스트레스에 대한 빠른 회복인데.
상대의 의도가 호의였다고 해도 내가 원치 않은 호의라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여실히 경험하였다.
상대도 그것을 모르진 않을텐데,
1) 자신의 호의에 매료되어 시야가 좁아졌거나
2)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집단 속에서 자신의 호의와 능력을 뽑내고 싶었거나
3) 수업을 가장한 나에 대한 수동-공격이었거나
4) 내가 원하든 원치않든 상관없이 설사 폭력적이더라도 진심으로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거나
정도의 이유가 떠오른다.
그 쓸모없는 것 같은 시간이 억울하여 어떻게든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어느 집단이나 그 집단 특유의 문화와 습성은 있다.
상담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때때로 나타나는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있다.
경계침범.
여전히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다.
내적 경험을 나누어야 진정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상대가 진정한 이해를 바라는 사람이 꼭 내가 아닐 수 있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는 '호의'를 가장한 오지랖으로 자신도 모른 채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리고는 자신의 의도가 오해받았다며 억울해 하기도 한다.
참으로 자기초점적 주의의 완성체라고나 할까.
설사 의도가 나쁘지 않았더라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나 몰라라'하는 태도가 무책임해 보일 때가 있다.
내 의도는 선했으니 '곱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네 탓이다'라는 식.
때때로 나 역시 상식을 넘어서 이해되지 않는 자세를 스스로에게 강요할 때가 있다.
무척 애를 쓰며 본성을 거스르고 내게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면서 부대낄 떄가 있다.
아마도 그것 떄문인 것 같다.
내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한 학기만에 번아웃된 것이.
난 여전히 그 진정성이 의심스럽고, 자기애를 감추기 위한 이타심이 싫다.
내가 꼬여있을 수도 있는데, 최소한 나는 친절한 가면에 숨지 않으려고 경계한다.
싫은 건 싫은 거지.
좌충우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아직도 찾아간다.
내 나이 35에도 여전히 내 색깔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질풍노도의 청소년처럼 짜증을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게 살란다.
미친년 널뛰듯 하루 하루를 지내더라도 삶의 지향은 아름답고 우아하게.
좀 낫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