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날씨는 좋고 마음은 무겁고, 할 일은 많고 학교 안은 시끄럽고.

플라밍고 2014. 4. 23. 14:39

 

테이크아웃드로잉카페, 한남동

 

 

오전에 필라테스를 마치고 충동적으로 무작정 학교를 탈출.

상대적으로 고통에 무딘 성향을 지닌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생각보다 박사과정이 힘겹지 않다.

오히려 좋다. 나에겐 흔치않았던 여유를 느끼고 있다.

물론 늘 그렇듯 바쁘다. 항상 할 일이 산적해 있다.

지금 누리는 여유가 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심적으로는 평온하다.

 

매년 그랬듯이, 봄이라 그렇겠지.

딱 기분 좋은 기온. 햇살 따뜻하고 바람 상쾌하고.

이 짧은 완벽한 봄을 망치고 싶지 않다.

살아있는 동안 이렇게 매년 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었음 좋겠다.

 

부귀영화를 입에 달고 살고 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고,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늙고 초라하다.

지금의 나는 남들이 탐낼만한 부러운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가장 만족스럽다.

 

캠퍼스를 반찍이게 만드는 20대의 생기과 활력이 더이상 내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마다 속상하긴 하다.

내가 가진 생기와 활력은 오전에 아주 잠깐만 지속될 뿐, 오후가 되면서부터는 급격히 사그라든다.

입술을 빨갛게 칠해보아도 예전에 비해 탄력을 잃은 피부는 생기를 오래 머금지 못한다.

게다가 부족한 수면으로 인해 눈빛은 총기는 커녕 피곤함을 덧입었다.

사랑하는 혹은 사랑받는 사람 특유의 설레임, 사랑스러움도 없다.

쓰다보니 정말 가진 것이 없고나.

아직 박사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기사 박사 학위가 있다고 해서 보장된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햇살 좋은 한낮에 카페에 앉아 이러고 놀고 있는 것이 좋다.

삶의 대단한 의미가 혹은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러고 놀고 있는 것이 좋다.

그냥 이렇게 놀고 있을 수 있어서, 살아 있어서 좋다.

그래서 더욱, 아직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사라져 간 수백명의 생명들이 너무나 안타깝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할까.

 

난 내 인생에서 지금 휴식 중이다.

어쩌면 지금이 무엇을 하든 즉흥적일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던, 무작정 학교를 탈출하여 봄을 만끽했듯이,

나의 충동성이 의미있는 가치가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