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분노는 나의 힘

플라밍고 2013. 2. 1. 20:38

 

 

 

자주 화가 나는 편이다.

화가 날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화를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황을 반추하고, 내가 했어야만 했던 반응, 대응들을 곱씹어 생각하면서 화를 키워서 힘들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통제불가능한 것이지만 오래 머무는 것은 아니다.

오래 머문다면 그건 감정이 아니라 생각이 머무는 것이라고 배웠다.

 

분노 조절을 위해 애썼지만 그리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내가 필요할 때 화가 나고 필요없을 때 화가 나지 않을 순 없었으니까.

분노는 생존을 위한 순기능도 있으니까 무조건 참는 것만이 능사도 아니다.

하지만 나의 그 마르지 않는 분노로 인해 종종 피곤함을 느끼곤 했다.

예컨데 출근길에 만원지하철을 타고 오면서도 얼마나 혼자 씩씩대고 화를 냈는지,

출근하자마자 기운이 빠지곤 했다.

그러고나면 하루종일 여유가 없고, 날이 서있기 일수라,

화낼 거리가 끊이질 않곤 했다.

스스로는 참는다고 절제한다고 노력한다고 했으나,

주변 사람들을 분명히 불편하게 했으리라.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겠다.

이전에도 수백만원을 들여 교육분석을 받으며,

거창하고 전문적인 분석을 해보았고,

나름 일리있는, 그러나 상당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유들을 찾아냈다.

이성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는, 합리적인 이유들은 이미 오래 전에 찾아내었으나,

나는 진심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문득, 느닷없이 받아들여졌다.

"아... 그렇구나!"

통찰. 이성적 통찰을 넘어서 정서적 통찰을 얻었다.

 

처음 상담을 글로 배우면서 이성적 통찰이 빠른 나를 뿌듯해하기도 했었는데,

정서적 통찰은 상대적으로 참으로 더디다.

참, 일관성 있게 반전있고 허당이다.  

다시한번 오만은 금물이다.

 

아무튼 나의 분노감의 원천을 깨닫고 나서 변화가 있다면,

불안과 걱정이 줄었다는 것,

눈빛이 부드러워졌다는 피드백을 듣는다는 것,

내가 특별한 존재임이 믿어지고,  

동시에 내가 남들보다 더 특별한 존재는 아님이 이해된다는 것.

마치 예전에 운동을 시작하고 엉덩이에 힘을 주는 방법을 알게되면서,

내게도 엉덩이에 근육이 생겼구나...라며 놀라워했던 경험과 비슷하다.

누구에게나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내게는 첫경험이고, 내 세상에선 없던 것이 일어난 놀라운 역사이다.

 

어째됐건 거창하게 표현하였으나,

나의 분노의 원천은 다음과 같다.

 

미진한 주제파악.

 

주제파악이 안되니 무턱대고 화가 나고 여기저기 들이받게 되는 것이었다.

현재의 내 자리, 내 위치, 내 지위에 대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인데,

주제파악이 안 될 때, 여기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어떤 분노 상황의 원인을 나 때문이라고 내부귀인 하게 됨으로써 스스로를 비난하며 못살게 군다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나'때문이 아닐 때도 많다.

당시의 돌아가는 상황으로 인해,

혹은 상대의 성품, 컨디션에 따라,

또는 시비와 상관없이 내 자리가 분노 상황을 수용해야 하는 역할일 수도 있는데,

마치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것인양, 혹시나 내 탓이 아닌데 내 잘못으로 여겨질까봐 억울하여 분노가 치민다.  

이는 마치 내가 세상의 중심인양,

누구나 알아봐줘야만 하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진 매우 특별한 존재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굉장히 책임감 넘치는 것 같을 수 있지만 넘치는 책임감 또한 자기애적 성향이다.

온전히 '나'때문이라는 착각.

혹은 온전히 '나'여야만 한다는 착각. 

그도 아니면 '나'만이 제대로 알고 있다는 착각.

결국 타인에 대한, 세상에 대한 불신.

그리고 아무리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듯해도 뿌리깊은 불신의 끝은 결국 나에 대한 불신이다.  

하지만 부족하고 미성숙한 것일뿐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다르지만, 모두가 그렇게 나를 보호해야만 했던 역사와 경험은 있는 거니까.

생존을 위해서 나의 한계를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고, 

그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배경 그리고 경험이 반영되어 다양하게 표출되는 것이니까.

어찌되었거나 저마다 그 미성숙한 방식이 스스로를 지키는데 한 때 유용한 방식이었기에 유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우연한 기회들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내가 예측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차 있음을 알아도,

실제로는 모든 것을 내가 통제하고 싶어서 안달이라,

경주마처럼 내 계획에만 열중하게 되거나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직면하게 될까봐 쉽게 포기한다.

전자의 경우, 내가 '원하는 것' 보다는 '해야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어,

성공을 해도 '혹시 다른 대안이 더 나았을까'라는 답 안나오는 미련에 충분히 행복해하지 못하고,

실패를 하면 깊은 실망감과 좌절감에서 쉽게 회복하지 못한다.

후자의 경우,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둔갑시켜서

실제로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 명명하였으므로 얻을 명분을 스스로 잃는다.

계획은 있으나 내가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많고,

실로 다양한 우연한 기회들이 즐비하다는 것을 조금 이해하고나니,

성공은 성공 나름대로 내 노력의 보상이라 의미가 있고,

실패는 실패 나름대로 내가 예상치 못한 또다른 길을 보여주니 재미가 있다.

결과에 대한 성공과 실패는 어느 시점에서 누가 평가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까.

다만,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끊임없는 변화가 생존에 유리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우연만 믿고 사는 것도 염치없고 심심하니, 

늘 노력없이 그 자리에 머무는 것만 지양한다면 성공과 실패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까지 오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하고 자유롭다.

 

우디앨런의 영화 매치 포인트가 새삼 떠오른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부족하고 한계가 많은 인간이라 권선징악을 꿈꾸는 것이 십분 이해가 된다.

그러나 많이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인생지사 새옹지마가 진리인 것 같다.

역시 옛말 틀린 것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애초에 주어진 의미란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며 살아가는 것.

믿을 수 없이 잔인하고 척박한 오늘 속에서, 아름다움을 믿고 살아가는 것.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것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참으로 위로가 된다.

오롯이 나의 선택만이 남는다는 것이 참으로 쓸쓸하지만 횡량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자유롭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