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히치콕 감독은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컷에 대해 하나 하나 넣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감독은 자신이 구성하는 모든 컷이 왜 이 영화에 필요한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디렉터가 해야 할 일이고 디렉터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책임감이다. 그것이 관객에게 신뢰감을 준다. 그 컷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다. 왜 필요한가를 고민한 후 그렇게 믿게 된 진정성을 밝히는 차원인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과 재미를 주는 포인트이리라.
그렇게 살고 싶다.
내 삶에서도 내 행동과 선택의 이유가 있었으면 한다. '그냥'이 아니라. 내 계획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삶이 흘러가지지 않더라도 내가 그렇게 계획한 이유, 선택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길 바란다. 내가 원해서 세상에 던져진 것은 아니지만 던져진 이후의 수많은 선택들, 나 이외에는 할 수 없는 선택들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까지는 뭔가 해야할 것만 같아서,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혹은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누군가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였다면 앞으로는 내가 가장 만족스러운 방향으로, 내가 가장 행복한 방향으로 내게 필요한 방향으로 선택의 이유를 만들고 싶다.
그토록 지루하고 오래된 불안과 방황은 그 선택의 이유였다. 내가 빠진 그 누군가들을 위한 선택들, 그 누군가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혹은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선택들이 곧 불안과 혼란이었다. 내 불안과 혼란에 대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수없이 반복적으로 이해하였지만 사실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 어른인척 흉내내며 주어진 일들을 무리없이 해내기도 하고, 성과를 얻기도 했지만 내 안에 깊은 곳에다가 아직 어린아이인 나를 꼭꼭 숨겨두었다. 어려운 선택들 앞에서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기 위해 기꺼이 내 자유의지를 내버린 것이다. 단지 누군가의 허락을 얻기 위해서만 앞으로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었을 뿐이다. 책임지지 않기 위해 불안과 혼란을 기꺼이 짊어진 것이다. 그 또한 그 당시 내가 살기 위한 선택이었으리라.
자유로부터의 도피
더이상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임을 여러 번의 실패를 딛고 알아간다. 꼭 찍어먹어봐야 된장인지 똥인지 아느냐고... 난 먹어보지도 않고 된장과 똥을 구별할만큼 똑똑하진 않은가보다. 어렴풋이 머리로 이해했던 단순한 진리들이 경험적으로 체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때때로 참으로 아프고 괴롭다. 굳이 그렇게 괴로을 것이 뻔한 진리들을 알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한데, 더이상 예전과 같이 살고 싶지 않고, 앞으로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가고자 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예전보다 더 나아질거란 보장은 없다. 누가 그걸 알겠는가. 단지 내가 달라지고 싶을 뿐이다. 다르게 살아보고 싶을 뿐이다. 그게 더 행복할 것 '같을' 뿐이다. 그게 아니면... 또 다른 시도를 해볼 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믿는 대로 시행착오를 겪는 것 뿐이다.
상담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어렴풋이 내 삶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속에 내가 그토록 두려워마지 않던 불안과 혼란이 있다.
아마도 난 그걸 은근히 즐겼나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한시도 떨어져본 적 없는 불안과 혼란으로부터 자유롭길 진정 바란다.
참 부족한 인간인지라 쉬운 길을 어렵게 간다.
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