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제와 헤어진 츠네오는 도로 난간을 붙잡고 오열한다.
그 전에 츠네오의 동생은 츠네오에게 지쳤냐고 묻는다.
츠네오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한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지오선배의 나레이션 중,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가지지만 결국 진짜 이유는 각자의 한계일 뿐이라는 내용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적합한 이유를 붙이고 싶어하지만
아무리 애쓰고 찾아도 결국은 자신의 한계일 뿐이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한계가 있음은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랑해도 지칠 수 있으며, 한계는 무능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계를 뛰어넘는, 더 훌륭한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 나를 무겁게 한다.
한계를 인정하거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것 중 정답은 없다.
어쨌거나 누군가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선택을 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그 어떤 상황이든 최선의 선택이 있을 것이라 믿었고,
나는 모르지만 나보다 뛰어난 그 누군가는 그 선택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나는 매 상황마다 정답을 몰라 고민하므로, 나는 아직 어리고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모든 정답을 알고 있을 그에게 난 늘 부끄러웠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믿음인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머리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 신념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멍청해서 모르고 있을 것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이 늘 나를 움직였다.
나는 부족하므로 늘 채워야 했고, 채워도 채워도 텅 빈 공허함은 내 일부였다.
그것이 때때로 나를, 타인에게 내가 아는 나보다 더 훌륭해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2년 전에 권경인 선생님께서는 내가 100% 진심만을 원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모 아니면 도. 100%가 아니라면 거짓이라는 믿음.
그러니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스스로의 진심을 가열차게 검열하면서 타인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두었다.
100%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늘 갈증났다.
나는 늘 공허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공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갈증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고,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보다는 그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것이 결국 그를 만족시켜주었는지,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내 방식이었을 뿐이다.
결국은 내 만족을 위해서였다고 하더라도,
내게 필요한 자유를 타인에게 강요했던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만이 100%는 아니었다.
내 삶의 방식이 비록 협소했지만 내 방식을 강요하여 나를 만족시키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병신같아도 완전한 병신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몇년만에 성석제의 '천애윤락'을 다시 읽다가,
"나, 나 말야,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어."라는 동환을 보고,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쩌면 나는 잔인하고 못돼 쳐먹어서가 아니라,
어느 한 구석이 망가지고 결핍되어서가 아니라,
어리석게도 동환처럼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내 행동과 사고의 모든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 한계를 조금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난 내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