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후...
여행은 돌아온 후에야 그 감흥이 느껴지는 것 같다. 전혀 새롭지 않고 이국적이지 않던 파리도, 돌아와보니 낭만적이고 고풍스러웠구나한다. 생떽쥐베리가 살던 곳, 고흐의 그림이 처음으로 전시됐던 카페, 에밀 졸라가 걸었을 길, 세잔느가 바라보던 풍경... 이제와보니 참으로 멋있는 곳이구나한다. 동시대인은 아니더라도 오래전 그들의 자취를 간직한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웠나한다. 그러면서 잠시 현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그 순간이 좋다. 그림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소통을 경험한다. 내 지각세계가 팽창하여 광활해지는 느낌이다.
더불어 조금은 씁쓸해진다. 여행은 나의 경직됨을 여실히 드러나게 한다. 경직됨이란 믿고 싶은 대로 묻고, 듣고, 보는 것이다.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리듬감이 필요한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내가 가지고 있던 도식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도식을 형성할 수 있는 역동적인 리듬감이 나는 부족했다.
내가 여행을 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모든 것은 통제되어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신념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의사소통도 자유롭지 않고 문화도 다르고 익숙한 것이 없는 곳에서,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나를 쉬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늘 반은 실패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익숙하지 않은 것도 통제하려 들고, 예측하려 든다. 하지만 반은 성공이다. 아무리 애를써도 익숙치 않음을 인정해야 하고,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때문이다. 여행이 아니고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기가 쉽지가 않다. 물론 머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한계, 그 안에서도 '나'라는 존재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다. 하지만 체화되지 못했다. 여전히 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고, 노력하면 해답에 이를 수 있다는 뿌리깊은 비합리적인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한번도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를 실감해보거나 감당해 본 적이 없다. 실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이 수두룩한대도, 어떻게 단 한 번도 '할 수 없다'라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는지는 머리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번 여행으로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그 자리에 가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여전히 미진하다.
노력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위험은, 실패는 곧 내 탓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시비를 가릴 수 없는 사태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결과를 내 탓으로 귀인하게 된다. 그것은 진짜 내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경험하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시비를 가릴 수 없는 사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 역시 내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어쨌거나 두 경우 모두 시비를 가질 수 없는 사태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태가 아님을 인정한다는 것의 잇점은, 그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면서 나와 타인을 괴롭히느라 무책임하게 제한된 시간을 축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알아가는 데 창의력을 쓴다는 것이다. 인간은 의미를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빅터 프랭클의 주장에 동의한다. 내가 무엇을 생각해야하고 무엇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지를 결정하느라 애쓰지 않았으면 한다. 경직된 나는 분명히 그러고 있을 것이 뻔하다. 부디 흘러가는대로 나를 놓아둘 수 있는 리듬감을 되찾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