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투정

플라밍고 2010. 8. 2. 22:13

어렸을 때 언니나 오빠가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곤 했었다. 의존하지 못하게, 강하게 키우신 엄마의 영향이 컸다. 어려서부터 혼자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학원 하나를 고를 때에도 친구들에게 물어 괜찮은 학원 몇 가지를 추린 후 각 학원마다 전화를 걸어 교재, 커리큘럼 등을 꼬치꼬치 묻고 선택하였다. 학교 다니면서 한 번도 엄마가 아침에 깨워주신 적이 없었고, 하굣길에 비가 와도 한 번도 마중나오신 적이 없었다. 지각하는 것도 아침에 우산을 챙기지 못한 것도 다 내 책임이었다. 초등학교 때 예쁘게 머리를 묶고 오는 여자아이들이 부러웠고, 그 아이들 머리를 유심히 관찰하여 머리 따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엄마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의존하려 해봐야 만족을 얻지 못하고 좌절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예상하고 대비하여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는 발생했고 그럴 때마다 속수무책이었다. 속상했다. 그래서 나보다 더 많이 경험하고 아는 것도 많은, 믿을만한 존재가 있어서 나한테 조언과 도움을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언니나 오빠가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내 동생은 나같은 상심을 겪지 않았으면 했고,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최대한 불편하지 않은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다. 동생이나 후배들 혹은 친구들이 나를 종종 '엄마'나 '이모'라고 부를 때가 있다. 동생뿐만 아니라 친구에게도 내가 먼저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어려운 점인지를 꼼꼼이 파악하여 그들이 최대한 편안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동생이나 친구 등 대인관계에서 주로 내가 챙겨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의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것이 때때로 너무나 피곤하여 억울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고, 투정부리고 싶고, 보살핌 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건 내 몫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했다. 부탁하여 거절당한 후 속상해하느니 그냥 내가 하고 마는 것이 익숙했다.

근데 갈수록 그게 좀 불편하다. 내가 잘 알고 잘 하는 부분이 있지만 전부 잘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투정도 부리고 어리광도 부리고 도와달라고 부탁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경험 많은 이가 이러한 경우에는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 수 있다고 알려주면 좋겠다.  내가 귀찮지는 않을까,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곤란하지는 않을까 생각하느라 망설이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어차피 내 선택을 누군가 대신해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결국 원점이다. 뭔가 늘 채워지지 않고 마음이 허한 것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그러게, 역시나. 다른 존재가 나의 허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기대할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이 사실은. 알면서 무한 반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