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두려움

플라밍고 2009. 12. 27. 23:00

한 때는 내가 남들과 같은 것이 싫었다.
나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 같다.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는데, 난 청소년기가 길었나보다.

지금 내가 한참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타인과의 공통점 찾기이다.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이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독특하고 특별하고 다양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 혼란, 두려움, 결핍은 대개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나보다. 
뭐, 여전히 자신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소통하기 어려울테고... 

예전에 학부 1년때 교양수업에서 원용진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 사람을 진보나 보수로 규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람 안에는 수많은 생각과 가치과 공존하고 그 중 일부는 진보적이고 일부는 보수적일테니까.
그래서 그 사람의 당시의 의견 하나 하나에 논박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사람 존재자체를 무엇이라 규정하지 마라.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체득하진 못했었던 것 같다.
지금에서 풀어보면,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수많은 조각 중 지금-여기에서 내게 이슈로 떠오르는 조각이 있을 뿐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일부이며, 내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개인이 독특하고 위대할 수 있는 이유는 타인과 유대를 형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유대감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홀로 살아간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키에르케고르, 사르트르, 하이데거와 같은 훌륭한 분들이 말해준 실존적 불안을 벗어날 순 없다.

내가 가장 관심있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적어도 나는 그 불안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행동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늘, 여지없이, 그 불안 앞에 서있게 된다. 
그 불안은 마주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내겐 가장 큰 숙제이다.  

상담에서는 인간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근본적인 두려움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바보같이 보일 것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텅 비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통제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역할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바보같아 보일까봐 두려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가열차게 검열한다. 그래서 외로워진다. 사람들은 거절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쌓고 방어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그때문에 더욱 소외된다. 또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관계가 깊어지면 자신의 텅 빈 내부가 들키고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종종 친밀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좌절하고 쓰러질까봐 두려워한다. 고통을 마주하고 나면 더이상 자신이 통제할 수 없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고 혼자서 감당하면서 더욱 고통받는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혹여나 이러한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잊어버릴까봐이다. 
잊어버려서 나 또는 타인이 겪는 두려움을 무시할까봐, 평가할까봐, 비난할까봐 두렵다.
지금 당장 내게 이슈가 되는 두려움이 아닐지라도,
그 두려움이 어떤 것이었는지 하나도 잊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너무나 모순적이게도 세상 속에 홀로 내던져졌음을 절실히 깨닫는 순간 타인과의 유대감을 느끼고 위로를 얻는다. 
홀로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유대감은 잊혀지고 철저히 혼자가 된다.
그 느낌을 조금도 잊고 싶지 않다.
나 또는 타인에게 느껴지는 두려움을 조금도 주저없이 민감하게 느끼길 바란다. 
혹시나 나의 두려움 혹은 그 누군가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때로는 치명적인 두려움을 간과하지 않길 바란다.  
2010, 경인년에는 덜 부끄럽고 싶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내가 누구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게 말이다.